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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머신

나도 고양이글 쓰고 싶다

_김영글 외 「나는 있어 고양이」

by 이태원댄싱머신

시인이 쓰는 에세이는 종종 읽었는데, 미술가의 에세이는 처음이다. 첫글은 매우 좋았다. 설마 다 좋지는 않겠지... 했는데, 예상적중. 다 좋지는 않았다.


1인 출판사 돛과닻의 대표인 김영글을 비롯해 여러 미술가들이 고양이에 대한 글을 하나씩 썼다.



이수성은 고양이 알레르기를 소재로 글을 쓰는데, 내용도 형식도 아티스트다. 어린 시절과 코로나 시대, 고양이와 인간, 아이까지 시선이 옮겨간다. 구조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고 변주하며 흥미롭게 전개된다.


나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의사가 할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지 마세요."
내가 이런 편견에 사로잡히는 데 영향을 준 사례가 있다. 20대 중반에 간헐적으로 기도가 좁아지는 증상이 생겨 의사와 상담한 적이 있다. 이 증상은 조금 특별한 경우에만 나타났다. 누운 채로 크게 웃거나 혹은 맥주를 한 캔 이상 마신 경우였다. 영화 <요람을 흔드는 손>의 주인공처럼 나는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숨을 쌕쌕거렸다. 의사는 절박한 나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완벽한 해결 방법을 알려주었다.
"누워서 웃지 말고, 맥주를 마시지 마세요." 23p
10년간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매일 밤 타틀린은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 살을 대고 잠이 들었다. 나는 집에서 언제나 콧물을 흘렸고, 팔꿈치나 발가락으로 타틀린을 만져 주었다. 졸업 이후에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하고, 작업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일했다. 쉼표와 쉼표 사이에는 무한한 조증과 울증의 곡선을 그렸다. 타틀린은 언제나 다정했다. 내가 우울할 때면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얼굴을 비비며 위로해 주었다.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내 품으로 들어와 귀를 핥아 주었다. 나는 눈물을 멈추고, 콧물을 흘렸다. 25p


차재민은 고양이와 함께 자라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따스하게 그린다.


어느 날 D는 현관 앞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열무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열무는 나를 뭐라고 부를까? 난 그게 너무 궁금해." 37p
나는 열무의 볼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긁어주었다. 콩의 손바닥을 주무르고 그 발끝에 내 코를 가져가 킁킁댔다. 배의 털을 결대로 쓰다듬어 주고 아무렇게나 얼굴을 파묻었다. 윗니 아랫니 사이에 내 손가락을 넣었을 때 아플 듯 말 듯 깨물어 주는 자극이 좋았다. 그즈음 나는 불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콩과 열무와 같이 자는 낮잠이 달콤했다. 온종일 잠을 자 버릴 때도 있었다. 38p


정은영은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찬양하는 글을 써내려가지만, 추모와 그리움으로 마무리한다.


고양이는 나에게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의외의 측면을 매 순간 발견하게 한다. 이를테면, 내게 결코 없다고 믿었던 절대적인 사랑과 복종의 감각 같은 것. 믿기지 않지만, 삼동의 포악한 묘성은 내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82p
삼동이 대개 하악질과 주먹질, 물고 위협하기로 이어지는 공포 통치로 집안의 일인자임을 자처하는 반면, 그래는 예쁜 목소리와 박치기, 스토킹에 준하는 졸졸 따라다니기 같은 애교 전략을 일삼아 매번 내 무릎을 꿇게 한다. 삼동의 발톱을 깎는 일은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정도로 극한 노동이지만 그래의 발톱을 깎는 일은 우리 둘만의 친밀한 스킨십에 준한다. 85p
삼동과는 여행을 가서 함께 바다도 보았고, 본가에 갔다가 고양이를 미워하는 모친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하물며 집회장에도 갔다. 삼동은 그야말로 나의 의심할 바 없는 '반려'였다. 여전히 집의 구석구석 어딘가엔 삼동의 털이 묻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날마다 삼동이 보고 싶어 작게 불러보곤 한다. 하지만 삼동은 그답게도, 내가 아무리 떠올리고 애타게 불러도 꿈에서조차 한번도 응답하지 않는다. 냉정한 놈 같으니, 끝내 묘성 논란을 해명할 길은 없어져 버렸다. 97p


나도 고양이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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