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석/아동문학가
1. 꽃밭에 내리는 비
해님이 만지는
꽃봉오리가
한 번만 한 번만
만지고 싶어
해님 몰래몰래
만져 보려고
가만가만
꽃밭에 내리는 비
꽃잎이 도망갈까
꽃봉오리 놀랄까
살짝
만져 보려고
보슬보슬
꽃밭에 내리는 비
2. 꽃밭에 서면
낮잠 자는 꽃
잠이 깰까봐
살며시 살며시
꽃밭에 서면
땅딸보 채송화
닭벼슬 맨드라미
키다리 해바라기
모두모두 꿈꾸는 듯
졸고 있네.
햇빛은 꽃잎 위에 앉아 쉬고
바람은 꽃 허리에 매달려 쉬고
꽃밭에서 꽃들이
쌔근쌔근 낮잠을 잔다.
3. 너와 내가 없는 강
꽃봉오리 틔운
한 방울 이슬이
묵은 꺼풀 씻어 내린
한 자락 빗물이
나, 이슬 아니고
너, 빗물 아니어
서로 섞여 흐르고
때로는
이슬이 빗물처럼
빗물이 이슬처럼
서로
함께
흐르는 강.
4. 어릴 때 남산
남산 기슭
바위에 올라
머리를 들면
솔잎 사이로
파랗게 잔잔히 흐르는
한강이 보였지.
물살이 세어 헤엄을 못 치던 한남동
통통배가 거룻배를 밀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서빙고 나루터.
강 뒤에 버티고 선 관악산 연주대를
비가 오면 쳐다봤지.
―저 봉우리 구름이 걷혀야
비가 갤텐데…
동작동에서
조금만 눈 돌리면
시커먼 개흙에서
미끄럼 타며 개헤엄 치던 샛강.
그 위로
인도교와 철교가
나란히 배를 깔고 누웠고
철교 위로
“칙칙 폭폭”
흰구름 뱉으며
기차가 강을 건너면
아아, 신나라
꼭 내가 타고 가는 것 같았지.
5. 초록빛 바람
바람이 며칠 두고
속삭이니까
사과 얼굴이
빨개진다.
얼마 뒤에 또
무어라고 하니까
사과는
힘없이
툭 떨어져
맨땅에 주저앉는다.
미처
손이 못 미친
구석구석을
샅샅이 찾아드는
바람이
오늘은
나를
하루 종일 에워싼다.
사과만큼도
알아듣지 못하는
내 귓가에
바람은
가만가만 속삭인다.
6. 안개꽃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어울리고
내가
아니라
너를 돋보이게 하는
어머니 같은
하늘 꽃.
7. 너와 내가 만나고 있는 곳은
미루나무는
하늘과 만나려고
목을 쭉 빼고 하늘로 오르지만
미루나무가 하늘과 만나는 곳은
비에 패인 조그만 웅덩이란다.
그것도 빗물이 있을 동안
아이야!
너와
엄마와
아빠가
만나고 있는 곳은
조그만 웅덩이일지도 모른단다.
빗물이 없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 할
미루나무와 하늘처럼 말이란다.
8. 아가의 얼굴
아가의 얼굴은
엄마의 얼굴
아가의 얼굴은
아빠의 얼굴
아빠 얼굴 조금
엄마 얼굴 조금
아가 얼굴 속에
숨어 있어요.
9. 예솔아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너 말고 네 아범
예솔아!
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아니고 네 엄마
아버지를
어머니를
예솔아-
하고 부르는 건
내 이름 어디에
엄마와 아빠가
들어 계시기
때문일 거야.
10. 네 웃음으로 산단다
회사에서 속상한
아빠의 마음을
네 웃음이
기쁘게 한단다
아이야-
하루 종일 일에 지친
엄마의 마음을
네 웃음이
가볍게 한단다
아이야-
아이야,
아이야-
아빠와 엄마는
엄마와 아빠는
네 웃음을 받아먹으며
슬픔을 기쁨으로 빚고
고통과 괴로움을 이기며 산단다
아이야-
11. 할머니
뜨거운 물을 마셔도
아이 시원해
매운 국을 드셔도
아이 시원해
콩콩-
어깨를 두드려도
아이 시원해
아이 시원해
지근지근
다리를 밟아도
아이 시원해
나도
나이 먹으면
할머니처럼
모두 시원할까?
12. 내 마음에 별
바람이
헤쳐 놓은
미루나무 이파리 사이
언뜻 내비치는
어스름 하늘
깜빡 깜빡
기다림에 젖은
나를 앗아가는
가녀린
별빛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