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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미 Jun 08. 2022

잊지 못할 어른을 직장에서 만난다는 것

행복 제조일자: 2022년 6월 7일, 하늘은 꾸리꾸리함

 2주 전 어느 날이었다. 스트레스를 감당하느라 온통 닳아버린 나는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작성하고 엔터를 눌러버리게 된다.


"선배 혹시 다음 주 회의 후에 한 번 따로 뵐 수 있을까요?"


그렇게 선배와의 첫 밥약이 성사됐다.

퇴사를 고민한 지 5개월. 드디어 한계점에 다다랐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선배에게 연락약속을 잡고 나니 그제야 헷갈렸다. 나는 어떤 목적으로 퇴사를 결정하지도 않은 시기에 같은 팀 선배에게 연락을 했나. 내가 퇴사하면 그만큼의 부담을 지게 될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 맞는가. 그나저나 나는 정말 고민상담을 위해 이 만남을 요청했는가. 그만둬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는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이 분에게 그만둬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도 모르게 '예 그렇죠 그만두는 것은 옳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면 그 책임은 어떻게 지나. 질 수는 있나. 나는 왜 이 분을 만나려고 하는가.....


막상 뱉고 나니 내가 저지른 일이 SOS인지 자진신고인지 몹시 헷갈렸다.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후배의 이야기를 의연하게 들어줄 수 있는 선배가 몇이나 될까. 고민을 털어놓는 만남이 될지, 단호하게 퇴사를 거절당하는 만남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만남이 나를 구원하진 못하더라도 나를 잠시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우리의 대화가 생각보다 몹시 어긋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면서도 내심 만남을 기다렸다. 내가 본 선배는 진짜 어른이었으니까.



그러다 2주가 지났다.

오늘 저녁 선배와 만났다. 선배는 회의를 마치고도 회의실을 떠나지 않았다. 둘 다 조용히 자리 정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 걸 타이밍을 기다리는 듯했다. 선배는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이야기하러 갈까요?"


죄인이 된 마냥 쭈뼛거리며 선배를 따라 나와 식당에 도착했다. 닫혀 있는 첫 번째 식당 앞에서 '이 닫힌 문은 내 미래를 의미하는 메타포인가'생각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이 문을 열고 나아갈 수 있을까.


첫 번째 식당으로 향하고 두 번째 식당으로 가기까지, 그곳에서 메뉴를 고르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릴 때까지 영 다른 이야기를 했다. 회사 주변 맛집에 대한 이야기, 야근할 때 샌드위치를 사 먹어서 이젠 샌드위치가 물린다는 이야기, 비가 올 것 같다, 제게 우산이 있어요 두 명 정도는 쓸 수 있는, 여기 커피가 맛있다는데, 이전에는 어디에서 일했나요, 거기에서 인턴 했어요.



연어덮밥 집에서 밥 두 술을 뜨고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꽤 의연하게 밥을 먹기는 애매하다. 잃은 사람처럼 엉엉 울다가 식욕만은 간직한 것처럼 밥을 먹기는 조금 머뭇거려지니까. 그렇지만 그걸 제가 해냅니다. 두 술 먹고 엉엉 울고 눈물 닦고 마지막 연어에 고추냉이까지 얹어서 잘 먹었다.


예전에 사수와 있던 일을 말하다 보니 처음 마음을 고백하는 것처럼 새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내 몸에는 피 대신 서러움이 흐르고 있던 것처럼!



초등학교 5학년,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명랑하게 학교를 다니다 따돌림 주도자에게 밑도 끝도 없이 선물을 받은 내가,


22살, 부점장에게 심하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같은 매장에서 1년 내도록 꿋꿋이 아르바이트한 내가,


어떤 상사와 11개월 일하면서 몸이 아프다. 만성 두통이 시작되고 쉽게 배탈이 나고 소화가 안 되고 뜬금없는 곳에 염증이 생긴다. 버스 타고 가다가 문득 눈물을 쏟는다. 늘 나를 치유하던 문학도 더 이상 힘이 되지 않는다. 책이 안 읽힌다.


밥 두 술을 뜨고 울기 시작했을 때 선배는 놀란 눈으로 날 보고 계셨다. 업계에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 상사는 늘 팀원을 잃었다고 한다. 상사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늘 최대한 빨리 상사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고, 실제로 도망쳤다. 5년 전에도 선배는 나와 같은 말을 하며 그만두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셨다. 선배는 말했다. 그 사람은 바뀌지 않아요.


나는 오늘, 5년 전 상사와 함께 일하던 사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와 같은 위치에서 지쳐갔을 그 사람을 생각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공장의 부속품 같은 처지가 된 사람들의 구조적인 이야기일까. 그저 운이 조금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일까.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 그런 건 덜 중요해졌다. 중요한 건 이제 내가 아프다는 사실이다.


축축하게 젖은 물수건이 된 것 같다. 꽤 쉽게 마음을 환기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잘 마르지 않고 계속 무겁게 젖어있다. 아카시아 향이 가득 담긴 여름날 밤공기에 뽀송하게 마르던 마음은 여행을 다녀오고 파도치는 바다를 봐도 돌아오는 길이면 다시 눅눅해졌다. 요즘은 바다를 봐도 마르진 않는다. 곰팡이를 앓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선배의 차를 타고 집 근처까지 왔다. 상사로 인해 너무 지쳐버렸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드라이브 마이 카를 너무 잘 봤다는 얘기, 명랑한 은둔자가 재밌다, 최근에 제2의 성을 읽었다, 학술대회 가는 것을 좋아한다 등등 이야기를 했다.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엄마 나이대의 중년 여성분과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랑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 좋은 어른과 대화하는 것 같다가 그랬다.


집에 오면서 선배를 생각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톡을 남겼다.


오늘 선배와 함께한 식사가 너무나 즐거웠고 감사하다고. 오늘 식사 중에 울어 실례가 많다고. 제가 크게 밑진 만큼 선배도 제게 크게 밑지셨으면 좋겠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oo씨에게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어주어서 고마워요.


우리 팀에는 oo씨가 없어선 안 될 핵심인력이지만 그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니 앞으로 진로와 관련해서 잘 생각하고 결정하고 차근차근 수행하길 바라요.


눈물을 보인 것이 부끄러울 수 있지만 26살에 나 또한 공장의 부속품 같은 내 처지 때문에 누군가 앞에서 펑펑 울었고 그때 내 앞의 누군가가 해준 일을 내가 oo씨에게 갚은 것이니 세대 간에 공평한 일입니다.


oo씨는 나한테 실례한 것이 없어요. 맛있는 게 별 것 아니지만 위로가 된 답니다.


팀으로 있는 동안 우리 더 맛있는 디저트를 먹어보아요, 최선을 다해서!"



잘해보려는 마음이 어떤 위력에 짓눌렸을 때.

너무나 영혼이 있는 내가 자아 없는 부속품이 돼야 했을 때.

천천히 부식되고 지쳐갈 때.


너무나 멀어지고 싶은 지금의 마음도 차분하게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내 마음을 안아준 세대에게 밑진 것을 후세대와 나누려면. 이런 마음도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


좋은 문장으로 기꺼이 내 편에 서주는 사람을 직장에서 만난 건 앞으로 또 몇 해 동안 없을 소중한 행복이다.

누군가를 향한 깊은 존경은 사랑하는 마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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