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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이사는이야기 May 24. 2023

Ep.16 라라랜드의 평범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군함 타고 세계일주]

“여행 어디 어디 가봤어?”

“진짜? 거기 내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인데!”


해외여행이 열풍인 요즘, 해외여행 이야기는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써먹기 좋은 주제다. 요즘의 우리나라에는 해외여행을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다녀와야지! 하는 분위기가 있다. 평범한 내 삶에 기대감을 주는 존재. 준비하는 설렘만으로도 삶을 영위해 나갈 힘을 주는 존재. 다녀와서는 사진을 정리하며 또 떠나고 싶다! 외치게 만드는 추억으로서의 존재. 특히 2~3년 동안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전 국민이 해외여행 앓이를 심하게 하는 중이다. 그래서 다들 엔데믹이 되자마자 경쟁하듯이 떠나는 것일지도.


나에게도 여행을 떠나고픈 장소들이 몇 군데가 있는데 그중 L.A를 제일 가보고 싶다고 하면 몇몇 동기들이 “우리 순항훈련 때 다녀왔잖아?”라고 되묻는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에이, 진정한 라라랜드를 가보지 못했잖아”


<LA LA LAND> (2016)


라라랜드는 나에게 인생영화다. 사실 나는 라라랜드가 내 인생영화인게 조금 신기하다. 왜냐하면 첫 만남이 너무나 별로였기 때문이다. 맘마미아처럼 밝디 밝은 뮤지컬 영화를 생각해서였을까? 쓸쓸함이 많이 담긴 영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그날따라 유독 피곤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쏟아지는 잠 때문에 영화의 흐름을 놓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흥미가 떨어지고 따분해서 중간에 껐던 것 같다. (그렇게 기억된다.) 이렇게 라라랜드는 몇 년 간 나에게 크게 기억에 남지 않는 따분한 뮤지컬 영화였다.


몇 년 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었다. 9년을 끝으로 군생활을 마무리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토록 원하던 전역을 하게 되는 후련함과 제로베이스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걱정이 내 마음속에 공존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그 무엇이 뭐가 될지에 대해서 확정적인 것은 없었다. 삶의 갈림길에 딱 서있던 때였다. 무튼 집에 내려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하지만 색다른 멜로디가 귀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멜로디에 집중하면서 계속 흥얼거렸는데 무슨 노래인지 잘 모르겠어서 ‘아, 이 쓸쓸한 느낌의 노래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하던 찰나에 라라랜드가 생각이 났다. 라라랜드 ost를 한 곡 한 곡 넘기다 드디어 ‘City of stars’의 피아노 전주가 처음 들리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음악 소리에 빠져 멍하니 서 있던 적이 있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노래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재즈바 Seb’s에 우연히 들어온 옛 연인 미아(엠마 스톤)를 바라보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그 순간 그대로 정지가 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저 배경이 되어버리는.


Welcome to Seb’s (… Mia)


City of star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별들의 도시여,
나만을 밝히려고 빛나는 걸까?)

City of stars,
There's so much that I can't see
(별들의 도시여,
내가 볼 수도 없는 것들이 참 많은데)

Who knows?
(누가 알기는 하겠어?)

Is this the start of something wonderful and new?
Or one more dream that I cannot make true?
(그게 원대하고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인지,
아니면 내가 이룰 수 없는 꿈이 하나 더 생겨버린 것인지)


- City of stars, Ryan Gosling


빵빵. 멜로디 하나에 버스를 놓칠 뻔했다. 정지된 순간을 다시 재생시켜 주는 친절하신 기사님의 경적 소리에 가까스로 버스에 탔다. 세종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도착해서도 한동안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라라랜드 ost로 가득했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라라랜드를 다시 봤다. 운이 좋게도 영화관에서 명작 재상영을 해주고 있던 시기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예전에 보다가 왜 중간에 껐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이렇게 좋은 영화라니! 노래부터 보라색의 배경 그리고 사랑, 인생, 꿈이 담긴 스토리가 좋았다. 그리고 내가 삶의 갈림길에 서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삶의 갈림길에 서있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여서 더 울림이 있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그제서야 나는 라라랜드에게 인생영화 자리를 건네줄 수 있었다. 라라랜드가 인생영화 타이틀을 얻고 난 뒤 나는 생각했다. 라라랜드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LA에 놀러 갔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할리우드를 비롯해 내가 방문했던 이곳저곳이 더 달리 보였을 텐데! 왜 라라랜드 탄생이 내 순항훈련 LA 방문보다 미래인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또 몇 년이 지나 최근 이 생각을 다르게 만들어줄 글을 만났다.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일까. 애초에 미래가 기억될 수 있는 존재일까? 소설은 자살을 꿈꾸는 두 남녀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미래를 기억해 내는 과정을 그린다.


이들은 남주인공의 외삼촌을 만나 어느 한 소설에 대해 묻는다.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자살하시기 전에 썼던 소설이라면서. 그 소설의 줄거리를 듣고 난 뒤 그들은 말한다. "이게 뭐죠? 당황스럽네. 줄거리가 꼭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아요. 올여름방학에 우리도 동반자살을 할 계획이거든요." 둘은 동반자살을 하기 전에 신을 연결해 준다는 줄리아라는 인물에게 간다. 마지막으로 신에게 답을 듣기 위해.


“신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지.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는 안 된다. 믿었어? 사실은 나도 안 믿었어. 그런 놀라운 말을 어떻게 믿겠어? 그러게.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 아니냐고. LA 여행을 다닐 때 미래에 LA를 사랑하게 될 것을 어떻게 기억하겠느냐고. 그래도 나는 말한다. 미래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LA를 사랑하게 될 텐데 이 여행을 대충 보낼 수 있겠냐고. 그 마음가짐이면 현재도, 미래도 행복할거라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기억한 덕분에 지금의 나는 현재를 충분히 살 수 있겠다.


Welcome to Los Angeles, before LA LA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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