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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Dec 16. 2023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마!


어느 날 아침, 나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늪 속에 빠져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발을 옮길 때마다 내 발을 기분 나쁜 질퍽한 손이 움켜쥐고는 저 끝 모를 바닥을 향해 끌어내리는 느낌이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바닥을 향해 꺼져가고 있었다. 내 머리 위로는 시커먼 먹구름이 모자를 쓴 것 마냥 따라다니며 내게만 비를 뿌리고 있었다. 희망 따윈 어디에도 없는 세상이었다. 오십 년이 넘는 삶에서 처음 진심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정신과 병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이름도 생소한 성인 ADHD, 중증 우울증, 공황장애 판정이란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를 받았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어떤 사건으로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이러한 상황을 아내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일은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기에 더욱 그러했다.   한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누군가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넌 너를 너무 피해자 입장에서만 놓고
생각하는 것 아냐?
다들 자기만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게 세상이야.


그 순간, 나는 뒷머리를 호되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내 증상이 호전되고 얼마 후, 그에게만큼은 내 증상과 치료 과정을 소상하게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그를 아끼고 믿었던 이유였다. 그러기에 그의 이런 말은 더욱 날카로운 충격으로 가슴을 후벼 팠다.


물론, 지금도 나를 진심으로 걱정했기에 그런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믿는다. 하루빨리 내가 부정적인 심리 상태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팩트 폭격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가 지겨울 정도로 내 병증을 자주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건 정말 몇 달 만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날 그의 이야기에 가까스로 아물던 내 생채기에서는 다시 한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리고 시렸던 기억의 통증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모든 상황에서 나를 피해자 위치에 두지는 않는다. 보통의 관계에선 오히려 그러한 마음이 드는 것을 경계한다. 피해자인 마음은 바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내가 피해자인 건 오직 공식적인 문서에 내게 거지 같은 낙인을 찍고 술자리에서 나를 안주삼아 시시덕 거리던 그와 그들 무리들과의 관계에서 뿐이다. 그리고 이제 내게 빅엿을 먹인 그는 명예롭게 퇴직하고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자리로 영전한다.


그들은 지금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네가 잘못해서 우리가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왜 네가 피해자인 척 해?


그러면 반문하겠다.


너희들끼리의 잘못은 서로 알음알음 눈 감아주고 덮어 놓고는 다른 이의 사소한 잘못은 네들이 도대체 뭐라고 따돌림을 하고 단죄를 하려 드는지.


실제로 아파 죽을 것 같은 사람한테
아픈 척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위로도 뭣도 아닌
그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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