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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소설입니다.

엄마의 기억

by 옥상평상




"응, 그 가게는 이제 태기 엄마가 안 해. 다른 사람이 하고 있어."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힘이 넘쳤다. 그래서 다시 건강이 회복된 걸로만 알았다. 하지만 엄마가 얘기하고 있는 가게인 그 횟집은 태기 엄마가 안 한 지 벌써 30년도 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기념할 만한 일이 있으면 그 30년 동안 주인이 바뀌는 동안에도 줄곧 그 횟집을 찾아갔었다. 오늘 엄마의 기억은 그 30년 전의 시점에 갇힌 모양이다.


"뭐야 엄마? 태기 엄마 다음으로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으.... 응? 그래?"


뭔가에 화가 난 듯한 막내동생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엄마를 나무라고 있었다.


"그래요. 엄마. 태기 엄마 다음에도 우리 가족 많이 갔었잖아요."


"응, 그... 그랬구나."


올 초부터 엄마는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원래부터 사소한 기억을 자주 잃어버리는 타입이기도 했지만 올해 들어서는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올봄 시장을 다녀오는 길에 낙상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진 이후 확연히 드러나고 말았다. 대문을 열쇠로 여는 것이 번거롭다 하여서 내가 사람을 불러 번호키로 바꿔 설치한 날이었다. 몇 번을 알려줘도 엄마는 도무지 6자리 숫자의 그 번호를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가 스마트폰 메모장에 그 번호를 적어주기까지 했지만 엄마는 번호는 물론 메모가 되어 있다는 그 사실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고서는 내 대신 문을 열어달라는 부탁에 찾아온 여동생에게 '네 오빠가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다.'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6. 25. 전쟁이 끝난 직후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듯하다. 하지만 엄마가 국민학교 시절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지고 말았고 그로 인해 한동안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엄마는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고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당시 서울 에 위치한 옥인동 근방에 살았던 엄마는 종로에 있는 작은 회사의 사환으로 일을 했었고 매일 출퇴근을 하며 등하교를 하는 또래 여학생들을 열등감과 부러움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때 하루는 교복이 너무 입고 싶어서 언니 걸 몰래 꺼내 입다가 고모한테 된통 혼나기도 했어. 고모들이 못됐었거든."


엄마는 이따금씩 그 당시를 회상하며 고모할머니들을 욕하곤 했다. 그러고서는 어느 날인가는 나를 데리고선 그 고모할머니 중의 한 분이 운영하는 낙원상가의 한 다방에 데리고 갔다. 아마도 급한 돈이 필요해 고모할머니에게 돈을 빌리러 갔던 걸로 기억이 난다. 울긋불긋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님들을 생글생글 맞이하는 고모할머니가 엄마를 그토록 구박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도 저 고모는 나한테 잘해."


조용필의 허공이란 노래가 울려 퍼지는 다방 문을 나서며 엄마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돈을 빌리지 못했다면 엄마는 뭐라고 그랬을까?


지금은 그토록 생기 넘치던 얼굴의 고모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그때의 그녀보다 나이를 먹어버린 엄마 역시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서글프게 다가왔다.


"엄마, 귤 보냈으니까 며칠 있다 도착할 거예요."


"응. 아들 맛있게 먹을게."


"전복은 다 드셨어요?"


"전복? 무슨 전복?"


"지난주에 제가 전복 보냈잖아요."


"......."


엄마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왕 엄마의 기억이 지워질 거라면 불행한 기억들부터 먼저 사라져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래야 엄마에게 남은 행복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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