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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을 찾아서

베로나- 밀라노- 슈피츠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스위스에는 예쁜 집들이 많다. 나중에 나도 이런 집을 만들어 살고 싶다.


9살 일기

트렁크가 많이 무거웠다. 화가 났다.


오늘은 스위스로 떠나는 날이었다. 보름 가까이 머물며 정마저 들었던 이탈리아를 떠나 호수의 도시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초저녁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새벽에는 그치겠지'하는 내 바람과는 반대로 아침까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우산을 준비해 오지 않았던 우리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는 가림막조차 없어서 근처 건물 처마 끝에 전선 위의 참새마냥 나란히 몸을 붙인 채 버스가 오기 만을 기다렸다.


한 달이 넘는 여행 기간 동안 우산 하나 없이 돌아다녔다는 사실이 새삼 너무 신기했다. 유난히 날씨 운이 좋았던 우리가 이동하면서 비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흐린 날씨에 아직 7시도 안 된 시간이라 바깥은 아직 밤처럼 어두웠다. 다행히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버스 덕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은 간신히 면했다. 베로나 카드로 버스를 타는 것은 처음이라 불안했지만 다행히 카드 하나로 모두 무료로 승차할 수 있었다. 정말 어제오늘 여러모로 알차게 사용한 베로나 카드였다.


이 시간 베로나 역에서 밀라노로 가는 구간은 완행열차뿐이었다. 유레일 패스를 사용해 1등 칸에 탔음에도 낡은 기차의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비에 젖은 우리를 추위에 떨게 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까 봐 신경이 쓰였던 나는 배낭에서 외투를 꺼내 아이들에게 입혔다. 아이들이 감기에라도 걸린다면 다음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 건강하게 따라와 준 아이들이 새삼 또 감사했다.


밀라노 역에 도착했다. 아침도 굶은 상태에서 한 시간을 추위에 떨었더니 몹시 허기가 졌다. 화장실도 이용할 겸 밀라노 역 1층에 있는 버거킹에 들러 세트메뉴를 시켰다. 몹시나 배고팠음에도 버거는 놀랍도록 맛이 없었다. 게다가 화장실이 매장 내에 없는 까닭에 다시 역사로 나가 돈을 내고 유료화장실을 이용해야 할 판이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들어온 중요한 목적이 화장실이었기에 맛없는 버거를 반쯤 먹다 버리곤, 매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화장실을 찾아 헤매다 지하로 내려가니 다행히, 맥도널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차피 따로 3유로 가까운 화장실 요금을 낼 바에는 그냥 맥도널드에서 메뉴 하나를 주문하고 이곳 화장실을 이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버거를 먹는 사이 나는 얼른 화장실을 다녀왔다. 다행히 화장실의 상태도 버거의 맛도 모두 만족스러웠다. 화장실 덕분에 밀라노 역에서는 본의 아니게 아침만 두 번 먹어버리고 말았다.

밀라노 역에서 무료 화장실을 찾아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스위스의 도시 슈피츠로 넘어가는 구간은 인기가 높은 예약 코스였다.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여행 일정을 짜면서도 가장 먼저 신경을 써서 예약을 한 구간이었다. 역시나 열차는 빈자리 없이 승객들로 가득했다. 예약을 하길 천만다행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기차가 정차하더니 직원들 몇 명이 내리고 다시 직원들 몇 명이 올라탔다.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이탈리아 직원들에서 스위스 직원들로 교체되는 순간이었다. 직원들이 승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검문을 했다. 검문 때문인 지는 몰라도 활달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이탈리아 직원들에 비해 스위스의 역무원들은 다소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을 주었다.

툰 호수를 경유해 인터라켄으로 들어가는 유람선을 타기 위해 슈피츠 역에 내렸다. 유레일패스가 있으면 유람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샀던 기념품이나 장난감 따위의 물건들을 집어삼킨 트렁크는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덕분에 1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선착장까지의 거리가 그 무게만큼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그나마 내리막길이라는 것이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려가며 간신히 선착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오늘 배는 모두 출발한 상태였다. 어쩐지 오는 길에 여행객들이 아무도 없는 것이 이상했다. 살짝 불안했는데 그 불안이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올 때는 내리막 길이었으니 갈 때는 당연히 오르막 길이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일우가 말했던 집이 어떤 거였지?

"아빠, 내가 끌고 올라갈게요. "


아까 내려올 때 일우가 트렁크를 끄는 모습이 재미있게 보였을까? 이번에는 혁우가 트렁크를 끌겠다고 제안해왔다.


'혁우가 과연 할 수 있을까?'


9살 아이에게는 무리일 것 같았다.


“힘들 텐데. 여기는 아빠가 밀고 올라가기도 힘든 곳이야.”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못 이긴 척 트렁크를 혁우에게 건네주었다. 힘 빠지고 짜증 나던 차에 마침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짜증이 난 상태로 끌고 가다간 애먼 아이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제 몸만 한 크기의 트렁크를 밀고 올라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처음에는 제법 힘을 내 힘차게 오르던 혁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기가 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끝내 못하겠다는 말은 않고 꿋꿋이 밀고 올라가는 모습이 나름 대견했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이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 혹시 아동학대로 보는 건 아니야? '


걱정 아닌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혁우가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만둔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대로 두기로 했다.


" 형! 좀 도와줘! "


결국 참다못한 혁우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쳐서 그런 건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건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내키지 않아 하는 일우 대신 내가 트렁크의 손잡이를 잡아끌었다. 혁우는 여전히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 나는 나중에 이런 집 짓고 살 거 에요.”

“그래. 아빠도 며칠 묵게 해 줄 거지?”

"당연하죠. 아빠 엄마 방도 만들어 줄게요."

일우가 동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삽화에나 나올 법한 예쁜 집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고즈넉한 스위스 마을의 풍경이 일우의 마음에 쏙 들은 모양이었다. 집들이 너무 예쁘다며 연신 감탄을 하는 일우였다. 반면 혁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떨군 채 땅만 바라본 채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혁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혁우야, 잘했어!!

2017.3.26. 베로나-인터라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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