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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해피 하우스

스피츠- 인터라켄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오랜간만에 우리나라 라면을 먹었다. 역시 라면은 우리나라가 최고야!

9살 일기

라면을 한 개 더 먹으려고 했더니 아빠가 안된다고 그랬다. 아빠는 구두쇠다.



힘겹게 언덕 위 슈피츠 역으로 돌아온 우리는 인터라켄행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직행이 아닌 완행을 타는 바람에 역 몇 군데를 더 정차하고 나서야 간신히 인터라켄 서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나 홀로 여행에서 머물렀던 작은 규모의 한인 민박은 이제는 제법 큰 간판을 역 앞에 내놓고 영업하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적혀 있는 붉은색 글자의 중국어 간판이 중국 여행객이 많이 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난번에 느낄 수 있었던 스위스 호숫가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아 아쉽기 짝이 없었다.

예약한 숙소의 이름은 ‘해피인롯지’였다. 가성비가 좋은 가격을 이유로 예약을 했지만, 숙소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아 예약 이후에도 줄곧 취소를 고민했던 곳이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조심스레 숙소 입구에 들어섰다.


"하이~"


다행히도, 반갑게 맞이해주는 종업원의 밝고 환한 미소가 나의 걱정을 상당히 누그러뜨려 주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던 숙소- 가운데 태극기도 보인다.

우리의 방은 4인용 도미토리 원룸이었다. 4명이서 잘 수 있도록 더블베드 하나와 이층 침대 하나가 있었는데, 다행히 다른 손님이 없어서 우리 세명이 한 방을 통째로 사용할 수 있어 좋았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 걸을 때마다 마루 바닥이 심하게 삐걱거렸지만 크고 넓은 창문으로 보이는 전망과 채광은 훌륭했다.


"몸은 괜찮아? "


"왜요?"


"아까 비를 좀 많이 맞았잖아. 그리고 기차에서 찬바람도 맞고."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침에 비를 쫄딱 맞은 데다 기차에서 차가운 바람을 쏘여 혹시라도 감기에 걸렸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이들은 물어본 내가 무안할 정도로 쌩쌩했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서는 언제나처럼 숙소 인근 탐방에 나섰다.

지난번 스카이다이빙을 했던 동료들과 맥주를 함께 먹었던 중앙광장은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여전히 푸르렀다. 일단 동네를 훑어볼 겸 큰길을 따라 인터라켄 오스트 역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내일 일정을 융프라우로 할지, 쉴트호른으로 할지, 피르스트로 할지는 아직 정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곳들로 출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 인터라켄 오스트 역을 이용해야만 했기에 미리 역의 위치와 열차 시간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숙소에서 무료로 나눠 준 버스 이용권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탓일까?

패러 글라이딩하기 좋은 날씨네~

그만 숙소와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말았다. 당황해서 허둥대고 있는데 인상이 부드러운 할머니 한분이 기사에게 이야기를 해 버스에서 내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다행히 내리자마자 맞은편 정류소에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금세 갈아탈 수 있었다. 버스에 앉고 나서야 경황 중에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하고 내린 것이 떠올랐다.


그분을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었다.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나 또한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그녀의 친절에 보답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여행 중에 받은 친절은 다른 여행자에게 갚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그녀의 친절은 여행이 길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지치고 메말라가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여전히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많았고, 그로 인해 여전히 세상은 살 만했다.

숙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 메뉴로 소고기 스테이크와 퐁듀를 주문했다. 원래 맥도널드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듣던 대로 스위스 물가는 맥도널드에서조차 너무 비쌌다. 오히려 식당에서 먹는 쪽이 가성비가 좋을 듯싶었다. 오래간만에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다행히도 스테이크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퐁듀는 그 가열되고 남은 와인 특유의 쓴 맛 때문인지 좀처럼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나름 구글 지도에 맛집으로 올라 있던 곳이었음에도 이 정통 퐁듀에는 아이들도 나도 쉽사리 수저를 댈 수 없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가볍게 먹던 퐁듀의 맛과는 많이 달랐다.


결국 식당에서조차 배를 채우지 못한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마트에서 구입해 온 한국 사발면을 먹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먹는 한국 라면이었다. 방에 전기포트가 비치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스페인 네르하에서 구입한 소형 커피포트가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아빠, 오랜만에 먹으니 정말 맛있어요."


"역시 우리나라 라면이 최고야!"


배가 고팠던 탓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먹는 한국 라면은 정말 꿀맛이었다. 여행 초기 마드리드에서 맛있게 먹었던 스페인 라면의 기억도 떠올랐다. 이제는 그조차도 추억으로 여겨질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 새삼 스스로가 대견하고 신기했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풍부한 육즙과 두툼한 고기가 맛있었던 스테이크와 문제의 퐁듀

일교차가 큰 인터라켄의 밤은 제법 쌀쌀했다. 다행히 라디에이터가 가동되고 있었기에 추위 걱정은 없었다. 따뜻한 라디에이터 위에 아이들과 내 청바지를 세탁해서 널었다. 제대로 빨지도 못한 채 꼬박 보름 동안이나 입고 다녔던, 땀에 절어 꼬질꼬질한 청바지였다. 내일이면 바짝 마를 청바지를 생각하니 마음마저 개운해졌다.


스위스의 첫날밤은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개운한 느낌으로 편안하게 흘러갔.


'숙소 이름에 '해피'가 들어가서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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