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터브루넨- 쉴트호른
11살 일기
나보다 세 살밖에 안 많은데 엄청 멋진 형을 봤다. 나도 그 형처럼 스키를 잘 타면 좋겠다.
9살 일기
아빠가 미웠다. 아빠한테 미안했다.
지난번 나 홀로 여행 때 융프라우와 피르스트를 다녀온 까닭에 이번 여행에서는 쉴트호른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쉴트호른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입하는 데에는 인터넷 쿠폰을 포함해 여러 가지 할인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숙소에 비치된 브로슈어의 쿠폰으로도 할인이 가능했지만, 인터넷 쿠폰이 40퍼센트까지 할인이 되는데 반해 숙소의 쿠폰은 30퍼센트까지 밖에 할인이 되지 않았다. 할인율은 인터넷 쿠폰이 더 좋았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싶어 그냥 숙소에 비치된 쿠폰을 이용하기로 했다.
쉴트호른으로 올라갈 때 추천하는 코스는 '인터라켄 OST역→라우터브루넨 역→ 그러취알프→뮤렌 →쉴트호른'였다. 반대로 내려올 때의 추천 코스는 '쉴트호른 →뮤렌 →김메발트→슈테첼베르그→ 라우터브루넨→인터라켄 OST' 순이었다. 올라갈 때는 기차와 케이블카 모두를 이용하게 되지만 내려올 때는 슈테첼베르그에서 라우터브루넨까지 버스를 타고 와야 했다. 나는 추천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인터라켄 오스트 역 앞에 있는 대형마트인 '쿱'에서 점심 간식들을 구입한 후 매표소로 향했다. 슈테첼베르그까지 가는 왕복권은 별도로 구입하는 쪽이 조금 더 저렴하다는 정보에 따라 슈테첼베르그행 왕복권을 주문했다. 하지만 직원은 '슈테첼베르그'라는 내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내게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왔다. 얼른 '쉴트 호른'이라고 얘기하자 그는 웃으며 바로 뮤렌까지 가는 왕복권을 줬다.
슈테첼베르그 왕복권 구입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유레일 패스 할인이라도 받기위해 패스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유레일패스보다 그냥 어린이 할인을 받는 쪽이 할인율이 높다며 알아서 더 높은 할인을 해주었다. 바쁜 업무 가운데 의사소통이 안되어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싫은 표정 하나 없이 낯선 외국인 여행객에게 유리한 할인율을 적용해주는 젊은 역무원의 모습에서 감사함을 넘어 감동까지 느낄 수 있었다.
라우터브루넨에서 뮤렌 마을까지는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갔다. 뮤렌 마을에서 부산에서 오셨다는 한국인 가족을 만났다. 보자마자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하는 일우에 비해 혁우는 쭈뼛거리기만 하며 좀처럼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굳은 얼굴로 혁우에게 다시 인사를 시켰다. 하지만, 혁우는 그 억지로 인사를 시키는 것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굳은 내 표정을 보고선 할수 없이 인사를 하긴 했지만 혁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단순히 숫기가 없던 것일 수도 있는데 억지로 인사를 강요한 것 같아 내 마음 역시 불편했다. 내가 어릴 적 혼나면서 배웠던 것이라고 같은 방식으로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으로는 때때로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
사실 내게 있어 인사는 단순한 예의나 도덕 규범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기술의 측면이 강했다. 인사란 같은 공간에 존재하게 된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의사표시로서, 상대방의 인정을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인정을 하는 편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유리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주고 받음(give and take)'의 법칙은 '인사'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용했다. 먼저 인사를 하면 그만큼 먼저 인정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어 가는 능력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특히, ‘밝은 표정으로 하는 인사’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있어서 최고의 윤활유이다. 나는 인사하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베이길 바랬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억지로 먹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특히 바쁘고 힘든 일정의 여행 중에는 더욱 그러했다. 교육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 같이 감정을 앞세워 야단을 치고 난 후에는 많이 후회스러웠다.
뮈렌 마을에서 쉴트호른까지 오르는 케이블카를 탔다. 근처에는 쉴트호른에서 뮈렌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스키장이 있었다. 케이블카 안에는 스키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우가 스키복을 입은 키가 큰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 웃고 있는 표정이 영어로 제법 대화가 진행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낯선 외국인과도 스스럼없이 교감을 나누는 일우가 대견했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만난 세계와 소통하려고 하는 그 용기가 가상하고 자랑스러웠다. 케이블 카가 멈추자 둘은 마치 오랫동안 알던 사이처럼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무슨 얘길 한 거야?”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길래 이야기해줬어요.”
“근데 그렇게 오래 얘기했어?”
“내가 형아 정말 잘 생겼다고 해줬거든요.”
지난번 스페인의 젤라토 가게에서도 그렇고 일우는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쉴트호른 정상에는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보행로가 있었다. 미국 그랜드 캐니언에서도 같은 형태의 전망대 바닥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곳의 스카이워크 전망대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야 했는데 반해 이곳은 따로 요금을 받지 않아 좋았다. 쉴트호른에서 촬영을 했다는 007 영화를 소재로 한' 007 박물관'에 입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즐길 것이 많았던 덕분에 영화를 보지 못했던 나와 아이들조차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혁우가 스마트폰을 쓰겠다고 해서 쥐어 줬더니만 10분도 안되어 스마트 폰에 꽂혀 있던 터치펜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전망대 어디에선가 떨어뜨린 것 같았지만 찾을 가망은 없어 보였다. 전망대 바닥이 철망으로 만들어져 있던 까닭에 터치펜 정도의 얇은 물건이 떨어졌다면 철망 사이로 빠졌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특별히 새로 장만했던 스마트 폰이었기에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떨어뜨린 것도 아닌 혁우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 죄송해요.”
"어쩔 수 없지. 뭘."
"아까 인사 안 한 것도 죄송해요."
나는 어느샌가 잊고 있었는데 혁우는 아침에 인사를 안 해 혼났던 것에 줄곧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어린 혁우의 진지한 사과에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나는 여전히 서툴고 미숙한 아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