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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머리에 벌레가 생겼어요!!

루체른- 취리히- 베른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귀여운 동생을 만났다. 사과를 주려고 했는데 동생의 아빠가 무서운 얼굴로 가로막았다. 아빠는 그 동생이 사과를 먹지 못하는 아이일 거라고 말했다. 가끔 어른들은 이상하다.


9살 일기

내 머리에 벌레가 살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아빠, 혁우 머리에서 벌레가 나왔어요!”

일우가 무언가를 올려놓은 손바닥을 내게 보여줬다. 그 옆에서 혁우가 자기 머리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사실이 무서웠는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들추어 자세히 보았더니 역시나 어릴 적 익숙하게 보았던 '머릿니'와 '석회'였다. 한 달 반 가까이되는 여행기간 동안 씻는 일을 아이들에게 온전히 맡겨 뒀더니 결국 사단이 나고야 만 것이었다.


일단 대도시인 루체른으로 가 약국을 찾아가기로 했다. '머릿니'라는 영어를 몰라 구글 번역기를 돌렸다. ‘head louse’라는 생소한 단어가 나왔다. 약국에 들어섰다. 내 발음을 못 알아들을 것 같아 스마트 폰 화면을 띄워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던 그녀는 내가 머리를 가리키자 바로 약을 찾아주었다. 어렵지 않게 약을 구할 수 있게 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아빠, 이제 내 머리에서 벌레가 없어지는 거예요?'

"응, 그러니 걱정하지 마. 대신에 앞으로는 머리를 좀 더 열심히 감자. "


내 얘기에도 혁우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머릿니'라는 것을 아홉 살 인생 동안 처음 봤을 테니 꽤 놀라기도 했을 터였다.

빈사의 사자상

루체른 호수를 지나 ‘빈사의 사자상’에 도착했다. 동상의 규모가 생각보다 거대했기에 놀랐다. 실제 동상의 사자의 얼굴은 성인 남자의 키보다 크다고 한다. 이 '빈사의 사자상'은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희생된 스위스 용병 786명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혁명군에게 궁전이 함락당하기 직전 루이 16세는 자신을 호위하던 스위스 용병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들은 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본분을 다해 최후의 1인까지 왕을 지키다가 몰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절대로 왕인 루이 16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은 전부 그들의 고향, 스위스에 있는 가족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척박했던 스위스의 땅은 농업 생산량이 좋지 않아 남자들은 타국의 용병으로 생활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행여 도망이라도 쳐 용병으로서의 신뢰를 잃게 된다면 후손들은 다시는 용병 일자리를 얻게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끝까지 루이 16세 곁에 남아 죽음을 맞이했던 이유였다. 가족을 떠올리며 죽어가던 그들의 마음이 참으로 애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감상도 잠시 뿐, 공원 입구 쪽으로부터 흡사 프랑스 혁명군 같은 위세의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빠, 빨리 다른 데로 가요."

"응응"


우리는 그들에 떠밀려 자연스럽게 다음 장소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감상을 더 즐기기 위해 굳이 루이 16세를 지키며 죽어가던 스위스 용병이 될 필요는 없었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호프 교회'를 거쳐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탑이 있는 '무제크 성벽'에 도착했다. '무제크 성벽'에서 언덕을 따라 내려오니 그 유명한 '카펠교'가 있었다. 로이스 강을 가로질러 만든, 유럽에서 가장 길다는 목조 다리였다. 다리 위에 덮혀진 덮개의 삼각형 부분, 페디먼트 부분에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페디먼트에 부조가 새겨진 것과 유사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100개가 넘는 그림의 내용 대부분은 루체른의 역사와 그 수호성인의 생애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아빠, 근데 왜 호프 교회는 성당이라고 안 그러고 교회라고 부르는 거예요?”

“글쎄다. 원래 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생긴 개신교의 예배당을 말하는 거긴 할 텐데."

제법 날카로운 일우의 질문에 폭풍 검색을 했더니 '호프 교회'로 번역된 독일어 ‘Hofkirche’에서 ‘kirche’는 성당과 교회를 모두 뜻하는 말이었다. 아마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되어 들어올 때 누군가 '교회'라고 번역을 한 모양이었다. '개신교 예배당=교회', '구교 예배당=성당'이라는 공식이 불변의 법칙은 아닌 모양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베네딕트 수도회에 의해 건립된 예배당이라고 하니 호프 성당이라 불러주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울 것 같기는 했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프 교회

다시 기차를 타고 루체른에서 취리히로 이동했다.

취리히 역 앞 맥도널드에 들러 햄버거를 먹고 취리히의 구 시가지인 '니더 도르프' 거리로 향했다. 취리히의 관광명소로 유명한 거리로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반호프 스트라쎄'이고 다른 하나는 이 '니더 도르프 거리'이다. '반호프 스트라쎄'는 파리의 샹젤리제나 런던의 리젠트와 같은 명품 상가가 늘어선 거리인데 반해 '니더 도르프' 거리는 소박하고 서민적인 거리였다. 독일어로 니더‘nieder’가 낮은 신분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도르프‘dorf’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니 합치면 '천민들의 마을' 뜻 정도가 될 것 같다.


다소 소박하고 평범한 느낌이었던 니더도르프 거리를 지나 아인슈타인이 졸업했다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으로 향했다. 스무 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학교라고 들어서였을까? 대학 광장에 자유롭게 앉거나 누워있는 학생들이 내 눈에는 모두 천재처럼 여겨졌다. 벤치에 기대어 멍 때리고 있는 학생조차 심오한 이론을 구상하고 있는 천재 과학자처럼 보였다. 역시나 인간은 선입견의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 모퉁이 벤치에 자리를 잡고 맥도널드에서 포장해 온 음식들을 꺼냈다. 하지만, 일우와 혁우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인지 음식에는 무관심한 체 광장 이리저리를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그러던 일우가 갑자기 내쪽으로 다가오더니 간식으로 챙겨 온 사과 하나를 가져갔다. 잠시 후, 그 사과를 한 스위스 꼬마에게 건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옆에 있던 꼬마의 아빠로 보이는 어른은 엄격한 표정으로 일우의 사과를 거절했다. 무안해진 일우가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힘없이 돌아왔다. 나는 그런 일우의 등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무안했겠구나. 어쩌면 사과를 먹으면 안 되는 아이였을지도 몰라.”


동양인 아이라고 해서 무시했다고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사과를 먹어서는 안 되는 걸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아인슈타인이 졸업한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

오늘의 마지막 탐방 도시인 스위스의 수도 '베른'으로 향했다. 베른 역을 빠져나와 지금도 시장이 열린다는 마르크트 거리를 지났다. 아인슈타인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였던 당시의 생가에 도착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관람시간이 지나버려 입장할 수는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오는 길에 시계탑에 들렀다. 옛날 베른의 관문 겸 방어탑으로 만들어진 시계탑은 나중에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프라하의 천문시계에 비해서는 심플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이 시계탑의 시계는 지금도 현역으로 베른 공공기관 시계의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베른은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을 졸업한 후,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백수로 지내다가 처음으로 얻은 직장인 특허청이 있던 도시였다. 아인슈타인이 살던 생가가 바로 이 베른에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그가 일했던 특허청 심사관 자리가 아인슈타인의 아버지가 부정청탁을 해서 얻은 자리였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칭송받는 이의 출발치고는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지 않은가? 천재의 출발도 그러했을진대 앞으로 펼쳐질 아이들의 시작에 조금 더 용기와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아인슈타인 생가 앞에서 판매하던 아인슈타인 피규어와 베른의 관문이자 방어탑이었던 시계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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