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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ssis Sep 12. 2018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케케묵은 이야기

케케묵은 철학적 논증의 부활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가 말하는 홀가분한 죽음, 그리고 그 이후

1. 요약

서울대 의대 내과 교수인 저자는 부모와 친척의 죽음을 지켜보던 중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라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한다. 철학적 사유에서 중요한 지점인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존재론에 대한 좋은 해답을 통해서 우리는 좋은 실천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존재론에 대해서 각종 논문과 저서, 미디어 매체 등으로 답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끝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얻게 된 영혼불멸설과 유물론을 부정하는 관념론, 권선징악의 내세론 등의 존재론을 통해서 2007년부터 죽음학 강의라는 실천론으로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고 있다.


2. 소감

저자의 내세관에 의한 인식론, 영혼불멸설의 존재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미 과거부터 반복되었던 철학적 논증 중에서도 케케묵은 인식일 뿐이다. 이러한 케케묵은 사유를 벗어난 현대철학은 개인의 내면으로의 침잠이 아닌 세상과의 관계, 구조를 바꿔나가는 실천론으로 향해있다. 하지만 저자가 가지고 있는 인식론과 존재론에서는 니힐리즘(허무주의)과 나르시시즘(자기애), 심해질 경우 파시즘(전체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절대로 추천할 수 없는 책이다. 또한 의사라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으므로 독자들에게 비판 없이 수용될 위험성이 높은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의대 교수가 쓴 근사체험 이야기로 인해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3. 비판점


1) 서술방식


1] 권위에 호소

의사들은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입각한 현대 과학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본인은 그에 더해 논문 300편 게재, 학술지 심사위원 경력이 있다고 하며 이런 의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 것을 강요한다.(p.128) 하지만 밑밥은 이렇게 깔아놓고 정작 영화나 TV 프로그램인 서프라이즈 등의 자료를 제시하며 객관성을 한참 벗어나고 있다.(p.138, p.144) 또한 『랜싯』에 게재된 논문을 제시하며 '저명한 의학 학술지에 발표된 근사체험'이라는 단어 사용과 함께 논문의 정합성 보다도 학술지의 권위에 호소하는 점은 명백하다.(p.73) 그와 함께 양자적인 비약적 발전을 이야기하는 서양의 윤회론자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과학적인 어휘에 권위를 기대는 점도 비판점이다.(p.198)

2] 입증 책임의 부재

과거의 영혼론에 대해서 현대 과학에서는 유물적 입장과 실증주의에 입각해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과학의 주장에 반박해서 저자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때문에 본인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본인 주장에 대한 입증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반대로 현대 과학 쪽에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순환논리에 빠져 있다.

3] 논리적 비정합성

의학도라는 점과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제시 등을 통해서 과학적 접근법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물질과는 다른 차원인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을 과학의 잣대로 들여다봐야 건질 수 있는 게 없다."라고 이야기하며 과학적 접근법을 폐기 처분하는 듯하다.(p.123) 반세기 전 양자역학을 끝까지 반대한 아인슈타인이 반박 자료 제시가 불가능한 입장에 놓이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며 과학자로서 신을 꺼내 드는 것으로 스스로 패배를 선언해버린 행위와 같은 맥락에 닿는다.

4] 확증편향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며 그 이외의 자료는 최대한 배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서 근사체험을 했다는 정보만 취합 분석하고 그 이외의 통계는 가차 없이 버려버린다. 근사체험 경험자 18%의 자료는 제시, 이 숫자에 비해서 4배나 많은 근사체험 미경험자 82%의 자료는 폐기한다.(p.74) 이러한 근사체험 경험자들의 공통된 체험이 '인간 뇌의 일반적 반응일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언급하지만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p.135)


2) 주장의 논박 가능성과 위험성


1] 뇌와 신체를 초월한 의식

인간의 의식은 신체를 초월해서 존재하며, 영혼과 내세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국내 서울대 강봉균 교수팀이 연구를 통해서 뉴런 사이에 있는 시냅스에서 기억의 저장이 이루어지는 시냅스 가소성 메커니즘을 규명하였다. 시냅스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형광물질의 개발을 통해서 입증을 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인간의 의식은 뇌 활동의 결과라는 주장이 실제적으로 입증되었다.

2] 철학적 실천론의 문제

철학적 사유는 크게 존재론과 인식론, 실천론의 세분류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철학은 실천론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실천론에 가기 위한 밑바탕에는 철학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두껍게 깔려있어야 한다. 때문에 좋은 실천론으로 가기 위해서 현대철학은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하며 내세관을 부정하고 있다. 과거에 관념론적 철학과 내세관을 내세웠던 철학들이 불러왔던 피로 물든 폭력적 실천론과 결별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과학적 접근법을 견지하는 의학도로서 관념론과 영혼론을 내세우며 좋은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무너뜨리며 또다시 허무주의와 자기애로 나아가며 좋은 실천을 짓밟는다.

3] 허무주의

영혼론과 내세관, 관념론에 빠질 경우 지금 발 뻗고 있는 이 곳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실천론보다는 저 쪽의 천국을 바라보며 이 곳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p.216)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계속 이어지는 다음 생을 위해서라도 지금 현실을 단련해야 한다는 실천론을 아무리 외쳐봤자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이러한 존재론과 인식론에서는 좋은 실천론이 나올 수 없다는 사유가 현대 철학에는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4. 정리


현재의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의 사유는 영국과 미국의 사유에 맞닿아 있다. 그에 따라서 관념론과 주체적 자아, 영혼론, 천국론, 내세론, 개인주의, 자유주의 등의 사유가 팽배해 있다. 이러한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현채의 저서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라는 책도 무리 없이 읽힐 것이다. 내세가 없다면 우리는 죽음에 공포를 가질 것이며, 내세 이후의 처벌이 없다면 현실 세계에서의 도덕론도 그 힘을 잃을 것이라며 두려워하지만 이러한 사유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체철학을 그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철학의 사유체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두려움 없이 현재의 우리 삶을 마주 보며 긍정해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철학자 알튀세르는 말년에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물을 통해서 스피노자(Spinoza)적이면서도 니체(Nietzsce)적인, 그리고 에피쿠로스(Epicurus)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는 코나투스(Conatus)를 타고났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집요하게 유지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기 앞을 비워두려는 힘과 의지를 타고난 개인들이 서로 마주치는 클리나멘(Clinamen)적인 새로운 의미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로 인해서 각종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이 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자신이 선택하는 온전한 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기존의 의미 체계와는 다른 의미체계를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과거의 의미 체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변화해나갈 수 있다.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순수한 결단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친 타자의 타자성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기존의 의미는 뒤흔들릴 것이고 주체는 의미를 새롭게 생산해낼 수 있게 되며 여기서의 주체는 개별자로 거듭나게 된다. 때문에 나는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라는 물음에 주체로 회귀하며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아닌 하나의 개별자로서 타자의 타자성으로 탈주하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5. 세줄 요약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우리(주체)는 이미 죽었다, 우리(개별자)만 있을 뿐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있는 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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