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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ssis Dec 31. 2018

[스피노자 에티카 후기] 한결같은 쓰레기

인간들의 핍박에도 끝까지 인간을 긍정한 스피노자

여러분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억되기를 원했다.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으로.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언제나 한결같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고 대단한 일인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고수하며 살아가던 와중에 가장 친한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현재의 네가 쓰레기 같은데, 한결같으면 어떡하냐? 바뀌어야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을 넘어서 신피질에 대출혈이 발생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 줄곧 세 가지 의문을 가져왔다. 첫 번째, 사람이 바뀌어도 되는가? 두 번째, 스스로의 주체적 선택이 아닌 타인이 원인이 되어 바뀌어도 되는가? 세 번째, 설령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나라는 실체는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변화와 주체, 실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지 어언 10여 년. 이제야 겨우 그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스피노자를 만나게 되면서.


스피노자는 이야기한다. 실체란 자기 원인을 가지기 때문에 외부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실체는 변용을 통해서 양태로서 존재하게 된다고. 여기서의 변용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실체에서 양태로의 변용이며, 두 번째는 양태와 양태의 마주침에서의 변용이다.

바뤼흐 스피노자 ⓒwikipedia

자, 이것으로 나의 10여 년의 의문은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첫 번째, 사람이 바뀌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는 자기 원인을 가지는 실체들이지만, 그러한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양태로서 존재해야 한다.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매 순간 변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흡하고 내뱉고, 피부 세포가 떨어져 나가고, 진피층에서 다시 새로운 피부가 재생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한 달 전의 나, 하루 전의 나, 1분 전의 나, 심지어 1초 전의 '나'는 '나'와 같지 않다. 이것이 양태로서 존재하기 위해 변용된 실체로서의 나의 모습이다. 그리고 변용 그 자체가 나라는 실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두 번째, 스스로의 주체적 선택이 아닌 타인이 원인이 되어 바뀌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변용의 두 번째 성질과 관련된다. 양태와 양태의 마주침을 통한 변용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만나는 눈 앞의 사람들, 책, 풍경, 사물, 음식 등의 타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마주침의 과정을 겪고 있다. 이러한 마주침을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변용의 과정을 거친다. 스스로의 주체나 타자라는 개개의 의식 과정 없이 세계와 끝없이 연결 접속되고 연결 접속하고 전염되고 전염시키고 변용이 일어나고 변용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신체이고 우리의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의 선택으로서의 변화가 아닌 삶 자체가 끝없는 변용의 이어짐이라는 내재성의 평면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설령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나라는 실체는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실체는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점은 매 순간 변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는 매 순간 변용을 일으키고 있다. 그로 인해서 나라는 실체는 매 순간 변용을 일으키고 있으며 변용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나라는 실체의 속성이다. 결국 나는 자기 원인을 가지면서도 변용의 가능성을 이미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원인으로서의 실체와 무한한 변용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게 된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질 들뢰즈 저 · 박정태 엮음 · 이학사 · 2007) ⓒLessis

스피노자를 통해서 변화와 주체, 실체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면서 동시에 우리는 두 가지 대상에 대한 무한 긍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첫 번째는 실체로서의 끝없는 변용을 되풀이하며 무한한 변용 가능성을 가진 자기 자신이며, 두 번째는 내재성의 평면에서 만나게 되는 양태와 양태로서의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타자'이다.


자, 그러면 한결같은 쓰레기인 나라는 존재에서 더 나은 존재로 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결같음은 변용의 거부이며 쓰레기라는 것은 생성이 끝난 죽음에 가까운 속성이다. 이때 내가 내린 해답은 간단하다. 그 해답은 두 글자. 바로 '타자'이다.


나라는 실체는 변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양태로서의 변용을 가능하게 하는 타자도 지금 내 눈 앞에 마주하고 있다. 결국 그 '타자'를 바라보게 되면 변화, 주체, 실체의 문제도 모두 해결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며 주체로 향하는 '죽음의 축'이 아닌 타자로 향하는 '의미생성의 축'으로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들에게 핍박 받으면서도 끝까지 인간을 긍정한 스피노자 ⓒesefarad

스피노자를 읽기 전 '주체'를 바라보던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억되기를 원했다.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으로.

스피노자를 읽은 후 '타자'를 바라보는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억되기를 원한다.

'언제나 한결같이 변하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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