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음식과 술에 관련된 콘텐츠라면 크게 개의치 않고 뭐든 쓰고 찍고 버무리는 에디터 손기은이다. 오늘은 낮샴에 대해 찬양을 조금 해보려고 한다. 일 때문에 시음 행사장에 가면 낮 11시에도 샴페인을 여러 잔 마시는 일이 많고, 유럽의 어느 좋은 호텔의 조식 뷔페에 샴페인이 나와 속으로 ’웬 횡재횡재’ 호들갑 떨면서 겉으로는 우아하게 한 잔 넘기는 일도 꽤 있다.
한낮에 마시는 좋은 샴페인 한 잔은 이상하게 정오가 되기 전 마시는 샴페인 보다 그 맛이 더 선명하고 명쾌하다. 한껏 텐션이 올라와 축배의 잔을 드는 그 기분이 아니라, 진짜 잘 구운 써니사이드업 달걀프라이를 젓가락으로 조금씩 떼어먹을 때처럼 기분이 말끔하고 쾌청해진다. 기가 막히게 온도를 잘 맞춘 샴페인이 서브 되면 겨울날 풀 먹인 두꺼운 이불 속에 처음 들어갈 때의 그 온도처럼 차가운 동시에 포근할 때도 있다.
오늘 추천하는 샴페인베세라 드 벨퐁과 프란치아코르타는 모두 정오가 채 되기 전에 처음 마시고 기억 속에 깊게 박혀 있던 것들이다.
베세라 드 벨퐁 샴페인은 최근 국내에 재론칭한 샴페인 하우스로 가스트로노미(Gastronomy) 샴페인을 표방하고 있다. 좋은 음식과 곁들일 때 가장 맛이 빛나는 샴페인이 되기 위해 양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보틀 모양이나 레이블 역시 식탁 위에서 모던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리뉴얼을 거쳤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무릎 위에 바스락거리는 새하얀 냅킨을 올린 채 베세라 드 벨퐁 엑스트라 브뤼를 한 잔 마시는데 또 기분이 청명해지면서 입맛과 혈색이 동시에 확 돌기 시작했다. 따뜻한 고소한 브리오쉬 빵의 귀퉁이를 조금 떼어 함께 먹으니 어제의 음주로 남아있던 숙취도 한 방에 사라졌다. 이 샴페인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기포가 정말 조밀하고 섬세하게 올라오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기포의 크기를 작게 만들기 위해 샴페인 하우스에서 과학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들었다. 그래야 식사에 곁들이기 더 좋은 한 잔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샴페인이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프란치아코르타가 있고, 내 기억 속 프란치아코르타 중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오전 11시에 마셨던 벨라비스타(Bellavista)다.
이탈리아 와인 시음회가 이른 오전부터 열려서 헐레벌떡 들어갔고, 이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고 정신이 또 번쩍 들었다. 상파뉴 지역에서 기틀을 닦은 와인메이커가 완벽하게 익은 포도를 골라 만드는 와인으로, 응축미가 느껴지는 맛과 힘차고 풍부한 향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이후로도 이 와인이 보이면 꼭 사둔다.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 마시기엔 벨라비스타 알마가 적절하다.
이번 연말연시에는 여럿이 모여 북적이는 홈파티를 열지는 못할 것 같다. 대신 대낮부터 샴페인 한 병을 까고 밤까지 조금씩 마시는 호사를 부려볼 생각이다.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을 챙기고 이걸 조물조물 포장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이럴 때를 위해 고이 아껴준 박영준(@park.d) 일러스트레이터의 포장지 패턴북을 드디어 꺼낸다. 내가 좋아하는 색감, 텍스쳐가 느껴지는 그림 때문에 평소에도 그의 작품을 계속 들여다봤는데, 이 패턴북은 실컷 들여다보다가 필요할 때 북북 찢어서 포장지로 쓸 수 있는 일석이조의 상품이다. 어떤 사람에게 무얼 보낼지 이제부터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 일단 샴페인부터 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