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떠났다.
비싼 비용 들여가며 사람들에게 치이기 싫어서 휴가철 여행은 덮어 두곤 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스크에 의존하던 시간을 벗고 다시 바다 너머로 걸음을 떼려고 할 때 시선이 닿았다.
더위를 피할 수 있고, 부대끼는 사람들에 비껴 있고, 가깝고 비용이 적게 드는 편이기도 한…
그리고 첫발 디디는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곳.
"더 이상 설레지가 않아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오래된 부부나 틀어진 연인 관계 사이에서 혹은 사회생활로 바빠진 사람들이 좋아하던 것에 대해 하는 흔한 말. 한동안 내가 여행 떠나기 전을 떠올리며 꺼내기도 했던 말.
오랜만이다.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짐은 떠나기 전 날이나 가는 날에 대충 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엔 준비할 게 많아서 미리 하다 보니 그랬나? (아니면 '두근두근'몽골원정대와 함께라?)
내가 지니던 설렘 같은 건 꺼낸 지 오래라 좀 녹슬긴 했지만 비스무리한 걸 품고 나섰다.
공항에 마주 나온 건 나어린 날 시간 비용 쪼개가며 번질나게 나가던 시절의 표정이었다.
주변의 들뜬 마음들 사이를 걷다가 덩달아 기대하게 된 표정으로 낯선 비행기로 향했다.
신규 취항한 제주항공과 조금 있어 보이는 아시아나항공 말고 'MIAT 몽골항공'으로 정한 주된 이유는 호기심.
드디어 입장!
낯.설.다. 처음 마주친 건 흐트러짐 없이 고운 미소가 아니었다.
건장한 승무원 아저씨의 새들한 스침이었다.
친절한 눈길도 건네지 않다니 좀 당황.
내 자리에 닿아 위쪽에 가방을 올리려는데 구겨 넣은 티슈 뭉치가 빼곡.
다른 칸에 넣으려고 살피는데 옆에 중년의 승무원은 바라만 보고 있다가
"NO!"
가방을 넣고 문을 닫으려는데 옆에 가방끈이 삐져 나와 있었던 것.
큰소리로 확실하게 알려주시니 차암 친절하셔서 황당.
다소 거친 상황을 연달아 마주해서 이게 몽골식인가 싶었다. 물론 승무원들은 대체로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그저 사소한 오해였던 걸로.
승무원의 다른 느낌에 나름 색다른 기내식을 기대했지만 '오리온 후레쉬베리' 보고 그런 거구나 했다.
그래도 메인 음식 맛은 괜찮았다는.
MIAT 몽골항공이 국적기지만 저렴한 편이고 비행기도 작다.
3시간 남짓 타고 가기에는 불편하지 않으니 괜찮은 선택지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볼 때, 보통은 바다가 땅으로 바뀌는 걸 보고 내릴 시간이 가까웠다는 걸 눈치 채곤 한다. 그런데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선명한 흙빛은 꽤 오래 너얼~리 이어졌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목이 마른 느낌.
좋게 말한다면 흙멍 돋는 풍경.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달려봐도~"
여름 한낮의 몽골 빛을 마주하니 딱 그랬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그 빛의 세기를 제대로 실감했다.
몽골의 '열렬'한 환대에 감사!
다만 걸음은 좀 미루는 걸로. 일단 그늘로 대피.
하마터면 올라탈 뻔했다.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파란색 ** 버스.
니가 왜 여길 지나가?
우리나라의 구형 버스나 중고 버스가 성형 없이 번호판마저 그대로인 채 울란바타르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버스에게 기억이나 감정 같은 게 있다면 진짜 묻고 싶었다. 어떤 기분이냐고?)
높은 건물 사이 차로 빼곡한 도로를 지나는 버스, 우리나라 도심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익숙한 편의점 빵집은 물론 곳곳의 한글 간판이 시시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공기 질, 거리의 빛깔, 뾰족한 소음마저 여느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으니…
이러려고 몽골 온 겨?
그 바람이 찾아왔다.
몽골 한낮의 더위와 따가운 빛, 찌그러진 소음을 피해 소곳한 그늘에 앉아 있었는데
그 계절 누구나 좋아 할 만한 바람이 다가왔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만 누릴 수 있는,
더위를 누그러뜨리며 묵은 생각을 부려 놓기도 하고 걸음을 부르기도 하는 바람.
몽골 여름에서는 흔한, 몇 가지 계절이 흘러가는 풍경이다.
바람이 적당히 걷기 좋은 공기를 만들어 주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덟 시가 넘어 아홉 시가 되어서도 해가 지지 않아서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몽골의 밤거리가 궁금하기도 했기에 핫하다고 하는 '서울의 거리'로 향했다.
어느새 어두워졌는데 멀리서 간헐적으로 번쩍이는 게 보였다.
일행에게 저거 번개 아니냐며 참 멋지지 않냐고 했다.
좀 더 걷다 보니 멀어 보였던 번쩍임이 가까워진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저렇게 멀리 있었는데 설마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가까이까지 왔겠어?
맞았다. 한두 방울 떨어졌다.
이러다 말고 금방 지나가겠지 했는데 점점 굵은 방울이 투박하게 떨어진다.
일단 멈춤. 주위 살핌. 건물 포착. 겁나 뛰어.
나름 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였다 싶었는데 꽤 많이 젖었다.
어쩌다 현지인과 주먹 인사를 했다.
비를 피하려는 몽골 현지인들도 하나 둘 우리가 있던 건물로 들어왔다.
점점 뒷걸음질 치는 상황에서 한 여자 분의 발이 내 발을 살짝 건드린 것.
그 분이 돌아보더니 나에게 주먹을 내민다.
"어떻게 하지?' 아주 짧은 순간 고민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 분은 웃어주었다.
그 사람, 무언가 오해할 시간도 안 주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 핑계로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눴다면 좋은 경험이 되었을 텐데...
이 상황이 궁금해서, 나중에 검색해 봤다.
"몽골에서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면 악수를 해라." 오래된 관습 같은 거란다.
이런 상황에 마주할 분들이 당황하지 않기를 바라며 관련해 찾은 내용을 공유한다.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1697948
그래서 비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들어갔는지 안 궁금할 수도 있지만 궁금한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준다면...
비가 조금 잦아들긴 했지만 그치지 않았다.
숙소까지 택시를 잡아 타고 갈까 싶었지만, 택시 잡는 현지인이 곳곳에 보여서 접었다.
버스를 타고 가려는 이들, 걸어가보려는 이들로 나뉘었다.
곧 그치겠지 하는 마음으로 숙소를 향해 걷는데 빗줄기가 더 굵어질 줄이야.
(나중에 버스를 탄 일행이 지나가면서 걸어가는 모습 봤단다. 그 말 하며 웃었다;;)
30분 남짓 거의 다 젖은 채 숙소에 닿았다.
다 와서 좀 뛰긴 했는데, 나름 마라톤 하는 느낌.
완주한 사람의 안도와 노곤함을 동시에 누렸다.
보상은 시원한 물 한 잔 두 잔.
나가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