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이 다른 구경
2018년 혜성처럼 등장해 수많은 영화 팬들을 매료시켰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돌아왔습니다. 샤메익 무어, 헤일리 스타인펠드,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제이크 존슨 등 전작의 출연진들이 복귀하고 오스카 아이작, 다니엘 칼루야, 제이슨 슈워츠먼, 앤디 샘버그 등 묵직한 이름들이 합류했죠. 본토에선 지난 2일 개봉되어 살짝 아쉬웠던 1편의 흥행 성적을 덮고도 남을 질주 중에 있습니다.
나 자신은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여전히 무겁기만 한 그웬. 무엇을 어디서부터 건드려 고쳐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가운데, 멀티버스의 악당들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골이 아프기만 합니다. 다른 차원들의 스파이더맨들과 협력하며 오늘도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그 때, 다시 만난 마일즈를 이제는 마냥 반갑게 맞이할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혁신은 없을 것만 같던 시기에도 항상 새로운 지평을 여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전작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만화책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작화에서부터 신선한 충격으로 가득했죠. 의도적으로 떨어뜨린 프레임과 적재적소에 들어간 말풍선이나 의성어, 구식 프린터에서나 보이던 인쇄의 특징을 연출 의도에 녹여내어 매 장면과 매 순간이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을 피터 파커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접근했던 시도도 훌륭했습니다. 피터 파커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스파이더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그 지점을 간파했습니다. '수퍼히어로'는 너무나 방대하고 '피터 파커'는 너무나 지엽적이기에, 그 중간에 위치한 '스파이더맨'을 겨냥해 캐릭터와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마일즈와 그웬을 비롯한 새로운 캐릭터들에게 빠르게 이입할 수 있는 이유였죠.
1편에서 이어지는 이번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그 장점을 계승하고 확장한 영화입니다. 여러 명의 스파이더맨을 등장시키는 것을 넘어 아예 모든 차원의 스파이더맨이 연합해서 움직이는 '스파이더 소사이어티'를 만들었습니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대중적으로 열어놓은 멀티버스의 가능성을 십분 활용해 익숙한 얼굴들과 새로운 얼굴들을 빠르게 엮어내죠.
그들은 모두 스파이더맨이고, 스파이더맨에겐 전 세계 관객들이 알고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토비 맥과이어, 앤드류 가필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영화들과 그 밖의 스파이더맨 코믹스 등으로 이보다 널리 알려질 수 없었던 공통점이죠. 소중한 사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동력의 양분 삼아 정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영웅적 심리입니다.
이 공통점은 새로운 스파이더맨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반복되어 일종의 피로감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이 되어야 하는 어린 주인공에게 아버지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은 곧 죽거나 이미 죽을 운명이고, 아무리 새로운 배우들이 연기하거나 새로운 캐릭터가 대체하더라도 어쨌든 알고 있는 이야기의 재현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었죠.
그런데 이번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그를 너무나도 영리하게 극에 녹여냈습니다. 어느새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의 자격에 따라오는 필요조건이 된 그 희생을 운명과 선택의 기로에 적용했죠. 상실의 상처를 안은 스파이더맨만이 진정한 스파이더맨이라고 주장하는 질서 앞에 맞섭니다. 만약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스파이더맨이 될 자격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라면?
영화는 똑같은 처지에 놓인 그웬과 마일즈를 내세워 스파이더맨이라는 개념을 새로이 규정하려 합니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10대에 스파이더맨의 초능력을 얻어 정의를 위해 싸우지만, 경찰인 아버지는 법 위에서 활동하는 스파이더맨의 존재를 못마땅해하죠.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하고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솔직할 수 없는 현실에 마음아파하면서도 대의 또한 놓을 수 없습니다.
덕분에 이번 영화에서는 전작에서 주목받았던 마일즈만큼이나 그웬의 이야기 또한 내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나 혼자뿐인 줄 알았던 순간 멀티버스와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의 존재를 알게 되는데, 그에 빠르게 적응한 그웬과 달리 어쩐지 그들 사이에서도 겉도는 듯한 마일즈의 모습에서 영화는 지금껏 같은 처지였던 둘의 기로를 분리하게 되죠.
여기서 영화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소재를 운명론과 결합한 선택의 가능성을 극대화합니다. 1편과 긴밀하게 연결된 설정을 확장시키고 마일즈와 그웬을 비롯한 주인공들의 서사를 파고들면서 세계관 전체의 동력을 확보하죠. 직전까지 쌓여 왔던 물음표들이 모두 느낌표로 변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흥미진진한 전개가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또 한 번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각본의 탁월함만으로 이 정도의 흥미를 선사한 작품은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최근 대부분의 화제작들은 기승전결은 예측 가능한 가운데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광경으로 승부수를 띄웠죠. 작년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탑건: 매버릭>은 그 접근의 정수와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런데 이번 <어크로스 더 스파이더버스>는 책을 읽듯 기승전결만으로 접근해도 손에 땀을 쥡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스파이더버스 시리즈가 아니겠지요. 이번 영화는 전편을 능가하는 훨씬 많은 볼거리로 140분의 러닝타임을 꽉 채웠습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오감이 풍족한 화면의 연속이죠. 작화를 차원과 캐릭터의 개성으로 승화시켜 다빈치의 스케치(?!)부터 실사에 이르기까지 풍성하고 다채롭다는 말로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눈요기가 끝도 없이 쏟아집니다.
마일즈와 그웬은 물론 미겔, 호비, 파비트르 등 움직임과 거미줄 하나하나가 정체성인 스파이더맨들을 비롯, 나사 몇 개 빠진 뒷골목 바보에서 세계관 전체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성장하는 스팟 등 악당들의 표현도 말 그대로 예술적입니다. 이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데 쏟아지는 중후반부에는 시선을 한 군데밖에 고정할 수 없음이 통탄스러울 정도죠.
스파이더맨, 악당, 친구, 가족 등 세어 보면 적지 않은 인물들은 물론 굵직한 사건들과 심지어는 여러 차원들을 한데 저글링하면서도 액션, 코미디, 음악 플레이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의 공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가진 것의 잠재력을 완벽하게 뽑아낸 터라, 이 영화가 시시하다면 스파이더맨이라는 소재나 소니의 애니메이션이라는 뿌리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학문의 영역에서 수 년간의 분석과 탐구를 거친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만들었을 법한,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팬 친화적인 영화입니다. 그 성과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이 영화는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자신감으로 가득하죠. 이보다 애가 탈 수 없는 장면에서 잔인하게도 끝을 내며 3편이 나올 2024년 3월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