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불 가리지 않는 화합
2015년 <굿 다이노>를 내놓은 피터 손 감독이 8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엘리멘탈>입니다. 레아 루이스, 마무두 아티, 로니 델 카르멘, 쉴라 옴미, 웬디 맥렌든-코비, 캐서린 오하라 등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죠. 전작이 2억 달러를 들여 3억 3천만 달러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2억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로 돌아왔습니다.
불, 물, 공기, 흙까지 4개의 원소들이 살고 있는 엘리멘트 시티. 서로 화합하며 모여 사는 원소들 가운데 잘못 닿기만 해도 다른 원소들을 해칠 수 있는 불은 미묘한 멸시를 받으며 도시의 외곽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날 때부터 성질머리 통제가 영 어려웠던 불 엠버는 어느 날 우연히 유쾌하고 감성적인 물 웨이드를 만나 특별한 우정을 쌓으며 지금껏 믿어 온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죠.
얼핏 <라따뚜이>, <주토피아>와 비슷해 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최소한 세상이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당찬 인물을 주인공으로 두고 있죠. <엘리멘탈>에서는 불로 태어나 다른 원소들의 괄시와 멸시를 받는 동시에, 엘리멘트 시티로 이민을 와서 차린 가게를 가업으로 물려주고픈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엠버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엠버가 웨이드를 만납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 집안에서 세상 물정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도련님 대접을 받으며 공무원이 된 물이죠.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감수성 덕에 툭 치기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매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지만, 엠버의 눈에는 그저 뭘 몰라도 저렇게 모를 수가 있나 싶은 철부지에 불과합니다. 닿기만 해도 한 쪽이 꺼지거나 증발하는 사이니 가까워질 수조차 없었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만큼 픽사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도전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손가락질하더라도 너는 할 수 있다고 속삭여 주는 것이 이 세상의 동심에게 전하는 픽사의 목소리죠. <엘리멘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도의를 넘어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원소를 주인공 삼아 그조차도 의지와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화면은 이제 기본입니다. <토이 스토리 4>쯤부터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빛을 다시 한 번 적극 끌어들여 엘리멘트 시티를 형형색색의 원소들로 꾸몄습니다. 물길을 가르는 기차부터 유리를 빚어내는 불 등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비어져 나오는 기발함에 감탄하게 되죠. 가전제품 전시장에 틀어 놓아도 무방한 색감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됩니다.
몇몇 장면은 아예 상상력 자체, 그리고 그 상상력이 빚어낸 장면을 과시하듯 연출되어 있습니다. 엠버가 웨이드를 태우고 열기구를 타는 장면, 올라선 광석에 따라 엠버의 색이 바뀌는 장면, 이어서 웨이드가 물 위를 달리며 무지개를 만드는 장면 등이 그렇죠. 슬쩍 보여주었다가 나중에 본격적으로 써먹는 복선 등이 아님에도, 어쩌면 써먹었어야 할 초능력 비슷하게 등장함에도 한 번 보여주는 데에 만족합니다.
사건의 전개 자체는 딱히 조각들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아닙니다. 엠버의 가게로 어쩌다 웨이드가 흘러들어와서는 단속 딱지를 떼는데, 그걸 아득바득 시청에 보고해 놓고는 곧바로 그걸 무르자며 같이 모험을 떠나죠. 문제의 원인이었던 수로 또한 구조 자체가 물이 빠져나갈 공간이 없는 곳이었는데, 그냥 파이어타운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을 생각은 하지도 않는 등 어설픈 구석이 많습니다.
그런 설득력을 감수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해야 할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엘리멘탈>은 엘리멘트 시티라는 설정을 통해, 주인공이 불이고 함께하는 동료이자 러브라인의 대상이 물이라는 설정을 통해 많은 것을 동시에 말하려고 합니다. 엘리멘트 시티에서 나고 자라 공용어를 모국어로 구사함에도 우리말을 참 잘한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는 장면엔 피터 손 감독의 기억이 녹아 있는 것처럼 보이죠.
현대 문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역사와 전통을 가슴에 간직한 듯한 불 종족의 묘사도 그렇습니다. 그런 곳을 뿌리 삼아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엠버는 미국이라는 곳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 2세, 3세들이 겪게 되는 안팎으로의 갈등을 그대로 담고 있죠. 뿌리를 부정할 수 없고 또 부정하고 싶지 않음에도 그것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순간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러한 메시지가 캐릭터 설정과 장면의 시각적인 연출에는 나쁘지 않게 녹아 있으나, 각본에 매끄럽게 엮여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영화가 이 모든 것을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 끝까지 결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엠버의 시선, 아슈파의 시선, 그 외 원소들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을 오가며 당연히 개인적이어야 할 기억들을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죠.
이는 <엘리멘탈>이 이민자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하나의 관계도에 담아내려고 한 욕심 탓이기도 합니다. 엠버와 웨이드의 로맨스, 엠버와 아슈파의 가업, 금수저와 흙수저의 계급 갈등,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우정, 인종 차별 등 하나에 집중하고 나머지 하나 정도를 부수적인 것으로 묶어야 했던 줄기들을 산발적으로 풀어놓으며 한두 개를 깊게 탐구하는 대신 여러 개를 표면적으로 훑는 데 그치죠.
예를 들어 엠버가 유리 공예에 소질이 있다는 설정은 각 줄기에 정반대로 작용합니다. 누군가에겐 생계가 달린 직업을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해 버리는 '그들만의 세상'이 싫고 또 좌절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에 꿈에 가까워지고 아슈파와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단단히 하게 되죠. 그렇다면 도대체 이걸 좋다고 봐야 하는지 나쁘다고 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나아가 엠버는 불 종족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라고 보아도 무방할 텐데, 그런 엠버가 종국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당당하거나 꿈을 좇는 당찬 모습 등등도 있겠으나 결국엔 특별한 재능과 그를 알아보고 또 지원해줄 수 있는 친구의 능력입니다. 종족 전체를 엠버에게 투영하기엔 지극히도 우연하고 특수합니다. 차별을 이겨내고 사회에 적응한 건 불이 아니라 엠버라는 겁니다.
귀엽고 깜찍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떠나가고 남는 혼란함은 이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위대한 사랑 이야기이자 위인전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겠으나,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정리하려고 하면 분명 그와 맞지 않는 장면이나 설정이 한두 개쯤 떠올라 쉽게 종잡을 수가 없어지죠. 차별 없이 하나되어 화합하는 세상이야 물론 아름다우나, 지나치게 얇아 뒷면이 비치는 공익광고 포스터를 보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