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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Oct 07. 2019

알고 있어 영원할 거란 걸

늘 장전돼 있는 그 말, 고미사영 H.O.T.

4K 화질까지는 안 되더라도 머릿속에서 꽤 선명하게 재생되는 초딩 시절의 몇몇 순간이 있다. 그중 하나는 같은 반 친구를 따라 학교 앞 문방구에 갔다가 그 아이가 신나게 이분의 사진을 고르는 걸 옆에서 구경했던 일이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도통 떠오르지 않지만 그 애가 H.O.T.가 누구고 자기는 강타(오빠)를 제일 좋아한다고 들떠서 얘기해준 건 기억난다. 이때는 몰랐다. 곧 내 인생 최고로 강렬한 덕통사고가 찾아온다는 것을(..)


장우혁은 왜 이름도 장우혁인지(aka 장왜장)

어느 주말, TV에서 하얗고 잘생긴 오빠가 나타나 망치 춤을 추던 장면과 그때 느꼈던 낯선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연예인을 싫어하다 못해 극혐하셨던 아빠의 싫은 소리가 자체 뮤트 되고 오로지 ‘캔디’ 무대에만 집중했던 그 순간. 그때부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이 되고, 무의식적으로 35라는 숫자를 되뇌게 된 건.


내 반평생을 지켜본 절친 M양 피셜로는 내가 왜 장우혁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말한 적은 없다고 한다. 중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한결 같이 장우혁 외길을 걸어온 새럼”이었다고. 내 입덕 계기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정신 차려보니 좋아하고 있었다(..)-따져 보면 입덕 포인트가 오조 오억 개일 것-


이렇듯 기억 속에서 첫사랑의 감정보다 첫 덕통사고의 감정이 더 또렷한 것은 내가 내추럴 본 덕후인 까닭이다.-NBD..?-

 

그런데 내 첫 덕질은 순탄치 않았다. 가훈이 기브 앤 테이크였던 적은 없지만 내가 H.O.T. 앨범을 득템하거나 음악 방송을 보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다. 학교/학원 시험에서 몇 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주로 공부와 관련된 딜이었는데 매정한 부모님은 이마저도 호락호락 들어주지 않으셨다.


내가 약속한 성과를 내더라도 절대 CD는 안 사주셨고-CD플레이어가 없다고 기각, 그래도 테이프는 얻어냄-, TV 리모컨의 지배자였던 아빠는 음악 방송 본 무대가 끝나면 칼같이 채널을 돌려 감격의 1위 발표는 안 보여주셨다. 당연히 클럽 H.O.T. 가입하고 싶다, 혹은 콘서트 보내달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 시절 내가 사랑한 레이혁

H.O.T. 장우혁 얘기만 하면 부모님의 매서운 눈치 폭격이 떨어졌던 터라 즐거운 덕질은 학교에서나 가능했는데 그마저도 짧았다. 중학생이 돼서 깡이 좀 생기려던 무렵 H.O.T.는 해체했고, 그날 난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숙제하다 펑펑 울었다. CD 1장 손에 못 쥐어 보고, 콘서트 한 번 못 가본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이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꽤 커서 그 후로 팝만 줄기 장창 들었고 그룹 덕질도 거의 못했다.-현오빠도 솔로 가수인 게 킬포- jtL은 애틋하고 아픈 손가락 같아 응원하면서도 힘들었고 무슨 장르의 어떤 아티스트/팀을 좋아하든 3년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내 첫 오빠는 구오빠가 되어 갔고 기다리는 것도 점차 포기하게 됐다.


드문드문 H.O.T. 멤버들의 소식을 보고 듣기는 했지만 나도 내 인생을 살아내느라 시간이 17년씩이나 지났는지도 몰랐다.-내 나이 눈 감아- ‘토토가 3’ 방송이 확정됐을 때도 “우왘ㅋㅋㅋ 오래 살고 볼 일이닼ㅋㅋㅋ” 정도의 유쾌한 톤이었을 정도. 그래서 나는 내 H.O.T. 덕질에 이미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어쩜 등장도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하시는지

거실 1열에서 각 잡고 앉아 ‘토토가 3’ 본방을 보다 추억의 오빠가 등장했을 때 내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건 땀이 아니었다. 명치끝에서부터 몽글몽글한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너무 좋고 기쁜데 아련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반갑고 신기한데 애달프기도 했던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이란.


첫 번째 방송은 울다 웃다 박수치면서 봤는데 두 번째 공연 방송은 그저 눈물 파티였다. 쿠션을 끌어안고 훌쩍이던 나를 보고 동생은 울보라면서, 오랜만에 추억이 방울방울이라며 새삼 언니가 얼마나 H.O.T.를 좋아했었는지 생각난다고 놀렸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약 8개월 뒤인 2018년 10월 13일, 잠실 주경기장에 전사의 후예가 울려 퍼지자 칠현 오빠아아앜!!!!”을 외치며 울부짖던 동생의 모습을. 나야말로 얘가 이렇게 좋아했었나 싶어서 신기했다.-대체 언제부터..?-


우리들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22년 만에 드디어 가 본 나의 첫 H.O.T. 콘서트는 울고 또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지나간 세월이 사무쳐서, 오빠들의 본업존잘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해서, 막상 보니 너무 좋아서, 가수도 관객도 이렇게나 행복해하는 걸 지켜보니 감회가 남달라 그렇게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정말 다 처음이었다. 굿즈 사겠다고 아침 8시 전부터 줄 서서 기다린 것도-더 일찍 갔어야 했다-, 노래 전주가 나오자마자 통곡을 금할 수 없던 것도. ‘전사의 후예’가 그렇게 눈물 콧물을 쏟으며 부를 노래가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을 육성으로 오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거늘, 콘서트가 시작되자마자 입에서 “오빠ㅠㅜㅠㅜ”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것도 처음이다.-이후로 지금까지 키보드든 육성이든 당당하게 오빠라고 부르는 중-


작년 잠실 포에버콘에서 다 울어서 그런지 올해 9월 고척돔에서 한 넥스트(메시지)에서는 중간중간 울컥하긴 했어도 기쁨과 설렘의 마음이 더 컸다.


특히 막콘 때는 좀 멍했다. 아쉬운 것보다는 공허하고 헛헛한 기분. 이게 무슨 복잡 미묘한 감정인지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完덕까지는 아니고 일종의 초연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염원했던 재결합도 콘서트도 내 두 눈으로 봤으니 이제 되었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 해도 큰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는 그런 마음.


그렇다고 눈물이 고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언제 들어도 찡한 너와 를 부를 때, 멤버들이 토롯코를 타고 내 1m 앞을 지나갔을 때-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제-, 우리들의 맹세떼창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멤버들의 얼굴을 볼 때, 리더가 저희를 지켜주셔서 고마워요라고 인사했을 때, 그리고 중간중간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라고 외치던 오빠가 끝내 울면서 고마웠어!  지내!! 보고 싶을 거야!!!”라며 퇴장할 때는 내 눈가도 촉촉해졌다.


박지선 특사가 말했던 것처럼, 우린 그렇게 늘 미안하고 고맙고 그런가 보다.


3일을 올콘했는데도 공연 중 나왔던 VCR 영상 내레이션이 달랐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20일 첫콘에서는 “우리가 기다릴 수 있을까?”였는데, 22일 막콘에서는 “우린 기다리고 있어 계속”이었더라.


언젠가 멤버들이 다 같이 쩌렁쩌렁하게 안녕하세요! H.O.T.입니다!!”라고 다시 인사하는 걸 듣고 싶긴 한데, 앞으로 기약 없는 기다림만 남았더라도 괜찮다. 2018-19년의 추억 덕분에 내 첫 덕질은 더 이상 쓰라리지 않게 됐으니까. 나는 내 삶을 또 열심히 살고, 이따금씩 칼박자 응원에 느꼈던 희열과 큰소리쳐 불렀었던 끝나지 않을  노래를 추억하겠지. 내추럴 본 덕후에게 덕질만큼 긍정적인 모티베이션은 없는 법이다.


잠실 2일, 고척 3일 올콘한 나 참 잘했다

내게 많은 처음을 선물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모든 기분을 알게 해 준,

내 덕질 히스토리의 영구결번 같은 존재,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돌 H.O.T.


내 마음 한 켠에는 늘 이 말이 장전돼 있다.

고미사영 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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