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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고통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고통들이 나의 영혼에게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에는 다 그랬잖아", "안그런 사람이 어디있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과거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니 나이정도 되면, 이제 니가 극복하고 삶을 살아야지 부모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들을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시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가 많은 사람들을 고통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점을 인정하고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노력할때 좀더 건강한 개인이 되고, 가족이 되고, 사회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점을 숨기고 아무 이상이 없는것처럼 살아간다면 진짜 문제는 인간의 무의식 깊숙하게 파고들어서 치료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가 대물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랜시간동안 저의 가족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때부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오랜시간동안 고통속에 지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생때는 그러한 고통이 당연한 것이고 그 상황에 대해서 어떠한 도움을 요청하거나 부모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게 일반적인 삶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는 알수없는 이유로 식탐이 생겼고, 그 이후로는 엄청난 비만이 되면서 놀림도 받고 힘든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때는 머리를 잡아뜯는 버릇까지 생겨서 머리도 많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서 저는 어떠한 이유를 찾을 시도도 하지 못했고, 그저 살았습니다. 아무런 생각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가 되어서야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아무도 나를 신경써주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려고 시작해서 겨우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수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공부의 결과는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집안에서 아무도 도와주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혼자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대학교를 갈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족들 아무도 신경써주는 사람이 없었고, 혼자 친구가 원서쓴 곳에 같이 가자고 해서 학과도 정하고 혼자가서 원서도 내고 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일련의 과정을 지나면서 부모나 형제들과 아무런 대화나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산다고 생각을 했던것 같습니다. 다른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이상한 사항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해서 소극적인 인간관계를 갖게된 것도 이러한 상황을 강화시킨 것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의 가족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대학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는 무엇인지 모르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내면에 대해서 이야기 할수 있는 기회도 없었거니와, 저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알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년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도저히 정서적인 어려움을 견딜수 없어서, 미국에서 상담을 하러간 적이 있습니다. 상담하시는 분의 첫 질문은 어디가 어려워서 왔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았을때, 저는 괴롭긴 한데 그것을 말로 표현할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상담을 받으면 상담을 하시는 분이 저의 정서적 고통을 자동적으로 치유해주는 줄 알았을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이 있다 정도밖에 이야기 할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저의 내면을 언어로 표현할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고, 그만큼 내면을 표현해본 경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면이 그렇게 혼동속에 있고 어려운데, 무엇이 문제인지도 설명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 지금은 이해할수 있지만, 그당시에는 정말 정서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고만 싶었습니다. 


그러한 정서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닥치는대로 책을 읽고, 매주 등산을 다니고,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보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저는 그동안 살아왔던 저의 삶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삶이었는지 알게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저의 무지함에 한줄기 빛줄기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서서히 우리 가족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 가족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러한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해서 어느누구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해준 사람이 한명도 없고, 오히려 좋은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들이 그렇게 사셨던 것은 비참한 한국의 근대사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비극이 가족의 고통스러운 삶으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족 내에서 문제점을 발견해 내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대신에,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숨기게 되면 정서적 고통의 해소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고통은 한 집안 내에 뿌리를 내리고 가족들 대대로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의식속에 그 수치와 고통을 담아두게 되면 결국 세대가 흘러가도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후손들이 고통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집안에서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문제점에 대해서 들을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저를 탓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움이 많아서 나서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서 우울증에 걸리고,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인 교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정서적으로 미숙하거나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게 되면서, 저의 내면에 타인에 대한 많은 관심과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고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고싶어하는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수많은 나르시시스트에게 고통을 당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런 사람들은 손절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같이 만나는 사람들과 마음도 나누고, 학문적으로도 열심이 있는 사람들과 교재를 나누는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건강상담 대학원 과정을 들으면서 필수과정으로 상담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얼마전부터 한달에 한번씩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상담을 받으면서 저의 내면의 갈등과 상황에 대해서 상담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저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내적 갈등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보면서 내가 많이 성장했구나, 이제 나의 내면을 이렇게 잘 언어로 설명할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동안 정말 너무 힘들었지, 정말 수고했어. 그 어려운 과정을 잘 이겨내 주어서 고맙다 하고 말입니다. 


저의 경우는 조금 극단적인 경우일수도 있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삶에서 많은 고통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인 고통가운데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단순하게 정서적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서 건강하지 않은 방법을 쓰다가 더 좋지 않은 악순환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지금은 어느때보다도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통을 같이 나누는 것이 필요한 시대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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