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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보이기 시작할때

과거의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고 느낄때

변덕스러운 날씨가 봄을 시샘하더니 이제 완연한 봄기운이 맨하탄의 센트럴 파크를 물들였습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어느새 물러가고 따뜻한 봄기운이 센트럴 파크를 푸르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여름의 무더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봄은 겨울과 여름 사이에 시나브로 지나가 버리나 봅니다.


오랜 시간동안 트라우마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현실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저를 혼동의 수렁속에 처박아 버렸습니다. 그 속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식도 하지 못한채 너무나 오랜시간을 극심한 고통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수렁속에서 빠져나온 후에는 삶에서 잃어버렸던 수많은 기회들에 대한 후회와 회한으로 고통스러워 해야 했고, 그 이후에는 부모들에 대한 극심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상담심리학 공부로 하고 정신건강상담 대학원 과정에 진학을 하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저의 삶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건들이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제가 경험했던 사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이 했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숨겨져 있던 거짓말들과 의도들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제가 외 골방에 저를 가두고 숨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두렵고 힘들었는지, 왜 내가 무기력한 방어기제를 개발할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직장 상사들과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도 피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았는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새로운 인식과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기력한 감정이 저의 삶에 얼마나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충분히 새로운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것조차 볼수 없었을 만큼, 저의 감정이 불안정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제 아내와 같이 저의 가족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전에 아내가 갈비뼈를 다쳤습니다. 통증이 심해서, 어제 정형외과에 갔었는데, 엑스레이를 찍은 결과 별 이상은 없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의사가 외형상으로는 멍이 든 흔적이 없지만, 안쪽으로 멍이 든것 같다면서 소염진통제를 처방해 주었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처방된 약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고 고통이 있으면,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병원에 가서 심각한지 아니면 사소한 것인지 검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육체의 병이나 이상은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여 줍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인정하지 않고 잘 알아차리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같이 했습니다. 저의 숙부님은 무지하게도 저의 생일을 10개월이나 앞당겨서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일찍 학교를 가면 좋을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러한 동생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서워서 학교가기 싫다고 하는 저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서 가라면 가지 뭘 울고불고 하냐고 6살먹은 자식을 몰아붙였습니다. 저는 그 손지검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울면서 맨발로 집밖으로 도망나와서 혼자 서럽고 무서워서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그때 저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저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50이 넘은 지금에야 전체적으로 이해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날때마다 저의 아버지는 이런 상황에 대한 내용은 다빼고,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 저를 낳았기 때문에 너무 늙기전에 학교를 보내려고 출생신고를 일찍 하고 학교를 보내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1년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생의 잘못을 가리고, 자신은 자식을 위해서 그러한 결정을 한것이라는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 가서 거의 두살이나 많은 아이들과 공부를 하면서 항상 뒤쳐지게 되었고,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알수 있었겠습니까? 부모들은 그런 저를 방치해두었고, 학교생활에 대한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그 어려운 시기를 버텨야 했습니다. 이유도 모른체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대되었고, 애착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애착 트라우마의 증상이 40대 중년이 되어서 사회생활중에 감정플래시백으로 나타나서 심각한 인생의 위기를 경험한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이러한 고통을 인식하고 말로 설명하는데 십년 이상의 독서, 삶의 실패와 좌절, 자기성찰, 명상, 상담심리학/정신건강상담 공부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필요했습니다. 


어제 아내와 저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참 먼길을 돌아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말로 설명을 하면서, 말로하면 20분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몸이 어느정도의 안정을 되찾고보니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는 것이, 참 허탈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는 시기가 있어서, 일정 시점에 이루어야 할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성취할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남아있는 시간은 더 값지게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인 저의 회복이지만, 그 과정중에서 만났던 수많은 선의를 가지고 계시고 도와주시려고 했던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통해서 저도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서 상처로 인해서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고통속에 괴로워 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수 있다면, 그동안 삶속에서 빚진것들을 갚을수 있는 기회가 될수 있을것이라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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