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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Oct 20. 2020

박근형 <청춘예찬>

[가리워진 길]

1. 

 청춘은 답이 없고 앙상하다. 이것은 예찬받아 마땅하다. 청춘이 그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찬을 잃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답이 없는 데에서 오는 고통과 줄곧 무성하다고 포장되지만 앙상한 실제 모습은 더럽게 빛난다.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청춘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청춘을 열다섯 무렵부터 기대해 왔다. 숱한 노래가 예찬하고 나를 가르치는 스승들과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그리워하고 꿈꾸는 그런 청춘이 궁금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행복하라는 말을 듣고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늙은 사람들 틈에서 무엇이 행복인지 잘 모르는 채로 시간을 보낸다. 


 과대평가되고 포장되어 마땅한 청춘은 유독 앙상한 인물들을 조명하여 <청춘예찬>이라는 작품을 채운다. 무대라는 비현실적 공간과 비참한 인물들의 설정을 이용해 예찬의 무용함을 드러낸다. 작품은 내가 그것을 읽는 동안 현실감각을 잃어버리도록 만든다. 괴로운 이들을 무대에서 조명할 때 이들은 낭만으로 덮인다. 청춘의 민낯을 조명하면서 바닥을 치는 낭만으로 다시 그것을 두둥실 떠오르게도 한다. 무대 한정 청춘 비극, 대사 한정 양아치 낭만 같은 것. 예찬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청춘에게 예찬은 소용없다.


 작품에는 행복이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아들에게 행복하여라, 하는 가사의 노래를 청하는 아버지와 그에게 행복하고 싶냐고 묻는 아들이 나온다. 그 아들은 또 자신을 두고 재혼한 어머니가 지금은 행복하겠지, 하고 체념하며 아버지와 자기를 개라고 말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설득해 왔지만 이제는 포기한 선생은 자신의 학생에게 행복하라고 말한다. 작품 속 행복은 허구이지만 인물들은 마음속 깊이에서 진심으로 행복을 좇는다. 그것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서로 속아 준다. 버티기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들의 행복이 잘 버티는 일과 분리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없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서로를 보듬는 비참한 이들의 자가 치유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건 너무 잠깐이고 우리는 서로를 할퀴기 더 바쁘기 때문이다. 지구에게는 자정 능력이 있지만 오염도가 너무 심해지면 그 능력은 소용이 없다. 이들도 그렇다. 서로 아무리 속아준들 아내는 떠났고 아버지는 교도소에 있고 태어난 아기는 커 가고 분유값은 비싸질 것이다. 지난 십이일에는 스물일곱의 쿠팡 물류센터 일용직 노동자가 과로사했다. 그런 사람들은 계속 있었다. 청춘들은 자꾸만 죽고 예찬받는다. 무대가 아닌 곳에서의 어떤 청춘들은 무대보다 더 앙상하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명성과 포장을 걷어내면 진짜 청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가. 그것이 진짜 청춘일 수 있나, 청춘은 진짜로 앙상한가.


2.

 이 작품에는 트리거가 될 소지가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가정 폭력과 여성 혐오와 성폭력이 등장하고 이것들의 폭력성이 축소된다. 나는 이러한 부분이 비판받아야 하며 혐오 없이도 작품이 던지는 물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페미니즘 웨이브 이전의 한국 희곡에서 자주 만나는 혐오를 내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비판해야 할지, 작품 자체가 가진 의도와 힘을 어떻게 분리하고 흡수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홧김에 어머니의 얼굴에 염산을 끼얹었고 어머니는 실명했다. 둘은 이혼했고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는 재혼하고 안마사로 일하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타 쓰며 산다. 어머니를 방문할 때마다 거짓말로 자기의 생활을 포장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축소하며 자기 탓을 한다. 아들인 청년은 이십 대를 살지만 고등학생이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욕을 더 많이 한다. 때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상스런 욕에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좋아하는, 그러나 타인에게 꽤 무례한 여성에게 더 무례하게 욕을 한다. 그리고 뇌전증을 앓는 ‘간질’이라는 인물과 섹스를 한 이후 임신 가능성을 말하며 함께 살자는 그에게도 욕을 하고 때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년은 그를 데리고 아버지와 사는 집으로 간다. 앞으로 밥과 빨래는 그가 할 거라고, 여기서 같이 살 거라고 말한다. 황당해하는 아버지는 어쨌든 같이 살기로 한다. 아기도 태어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가 아기 보러 한 번 오라고 말한다.


 위 고민과 더불어 작품이 주목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청년이지 어머니와 아들에게 욕을 먹는 여성들이 아니다. 인물 ‘간질’의 이유 있는 순함과 어머니의 자책과 안마사로서의 삶과 이혼에 관한 저들의 진실과 거짓이 궁금하다. 궁금한데도 작품은 자꾸만 아버지와 청년만 불쌍히 여긴다. 나는 꼭 이들의 전말과 속마음을 녹인 연극을 보고 싶다. ‘운수 좋은 날’의 운수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로테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로테/운수>에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생략된 서사는 내 시선을 움직인다.


 <청춘예찬>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폭력의 흐름을 넘어 겹겹이 가려진 이들을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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