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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Jun 22. 2021

35- 이미지의 세상이 닥쳐올 때의 나의 도구는

 무엇, 어딘가 혹은 누군가를 글로 묘사할 때의 특징은 원하는 것을 가리거나 내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겨레가 길가 벤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을 묘사한다면 내 문장에는 겨레와 벤치, 아이스크림 정도만 등장해도 충분할 일이다. 하지만 겨레의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벤치 뒤 길을 건너는 사람이 사진에 담길 확률을 무시할 수 없다. 분명히 겨레를 찍었음에도 모르는 사람이 담긴다면 나는 그 사진을 함부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할 수 없다. 또한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모르는 사람의 휴대폰에 자신의 모습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담겨버린 것이기도 하다. 여행 중에 이러한 일은 셀 수 없이 잦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당황스러움의 홍수 속에서 나의 도구는 대체 무엇이어야 할까.


 모르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적는 일과 그가 직접 영상이나 사진에 찍히는 일은 다르다. 글로 적히면 누구나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영상이나 사진에 찍힌다면 누구나 그를 특정하거나 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그를 인식하는 것과 별개로 요청하지도 않은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남겨지는 일이다. 내게 이러한 기록 도구는 몹시 어렵다.


 글보다 이미지, 이미지보다 영상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창이라면 나는 글이 아닌 것들도 익히고 싶다. 하지만 당최 어디서부터 찍어도 되고 어디서부터는 안 되는지 어림잡을 수가 없다. 기가 막히게 잘 찍은 시장통 사진 속에 담긴 숱한 모르는 사람들, 이들의 모습이 내 마음대로 기록되어도 되는 것인가. 아니, 비인간동물이나 식물은 함부로 나의 피사체가 되어도 괜찮을 일인가, 내가 렌즈를 들이대는 이곳이 진정 그래도 되는 곳인가.


 눈으로 보고 순간을 글로 기록하고 기억을 더듬어 묘사하고 공유하는 일과 렌즈로 보고 순간을 찍어 업로드하는 일은 천지차이였다. 고려할 것이 너무 많아서 체코에서 본 환상적인 버스킹이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본 개양귀비 밭이나, 네팔의 고요하고 장엄한 페와 호수,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호주의 아보카도 농장을 찍고도 지울 수도 남겨둘 수도 없었다.


 글을 쓸 때는 써도 되는 말과 절대로 쓰면 안 되는 말이 내 안에 비교적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조심하고 조금 여유롭게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글로만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지의 세상이 닥쳐온 지 오래인 와중에 아직도 서투른 한 가지 도구만 고집하지 말고 여러 도구에 손을 뻗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면 내 촬영에 동의하지 않은 생명체들이 등장하고 퇴장한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을 찍었는데 그런 생명체가 귀퉁이에 찍힐 때마다 나는 탄식한다.


 나의 모든 탄식들은 내가 아직 서툴기 때문일까. 아니 그전에, 서투르고 아니고 따지기 전에, 내게 무엇을 찍을 권리는 있는지 알고 싶다. 카메라를 손에 넣기 전에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찍어 기록하고 싶은 장면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나는 고민 없이 카메라를 들어버린다. 하지만 이내 생각에 잠긴다. 촬영한 것은 어디에도 업로드되지 않는다. 


 ‘나는 버스정류장 뒤에서 나를 쳐다보는 포섬을 촬영해도 되나? 남의 반려견이 너무 귀여우면 사진을 찍어도 되나? 근사한 바에서 기념사진을 남겼을 때, 귀퉁이에 직원이 등장하면 그 사진은 내 사진인가?’


 잘 짜여진 이미지는 좋은 창틀이 된다. 나도 좋은 창틀을 짜고 싶다. 지나가버린 아쉽고 황홀한 모든 순간들을 기록해 공유하고 싶다. 이 긴 여행을 어떤 도구로 담으면 오래도록 잘 보관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오래 고민해도 아쉽다. 때문에 다시 카메라를 집는다. 메모장을 켠다. 남겨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을 것들을 다시 기록한다. 아무래도 욕망이다. 생각을 다시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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