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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오니 Aug 26. 2022

관찰의 기록: 나는 당신의 사연이 궁금합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가 말았다 하는 어느 봄날.

이른 아침부터 서울에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환승해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막 환승역, 지하철에 발을 디뎠을 때 내 눈앞에 들어온 한 남자.

그는 차디찬 지하철 바닥에 앉아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하철 안에는 이미 자리도 충분했고, 서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렇게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흔히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일정에 마음이 조급해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처음 가는 곳인데 길을 잘 못 찾으면 어쩌지?’

지도 앱을 켜서 몇 번이고 위치를 살폈다. 그런데 문득 ‘도대체 저 남자는 무슨 노래를 저렇게 진지하게 부르는 걸까?’ 궁금했다. 이어폰을 슬쩍 뺐다. 무심하게 귀를 기울였다. 때마침 내가 들었던 부분은 ‘나는 애만 태우네’였다.


뜻밖에도 그가 열창하고 있던 곡은 김윤아의 <야상곡>이었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 주려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 김윤아 <야상곡> 중에서


그는 정성을 다해서 노래에 푹- 흡수된 듯한 표정으로 야상곡을 부르고 있었다. 본래 슬픈 정서를 담고 있는 곡인 데다 그의 목소리를 빌려 불려지는 <야상곡>은 말 그대로 구슬프기까지 했다.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결과,

‘구슬프다’

[형용사] 처량하고 슬프다.


내가 이만큼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낯선 이의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동시에 내가 가야 하는 역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스르륵- 지하철 문이 열렸다.


역을 빠져나가면서도 이름 모를 남자가 부른 <야상곡>의 잔상에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마음속을 스친 단어는 한 가지, 바로 ‘한(恨)’이었다. 한을 풀어내는 것은 참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오랜만에 낯선 이의 노래에서 그 정서를 고스란히 느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누구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았다. 온전히 노래에, 그리고 노래에 담긴 정서를 풀어내는 데에 충분히 열중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지하철에 오를 때마다 몇 번이고 <야상곡>을 재생했다. 혹여나 노래를 부르고 있던 그때 그 낯선 사람을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온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부르던 그날 그의 모습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낯선 이 마음 저편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감히 짐작해봤다. 작위적이지 않았던 그의 진심 어린 노래에서 내가 느낀 건 바로 '한'이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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