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들은 대부분 인간은 결코 숫자나 통계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 동의한다. 인간은 워낙 복잡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들이 얽혀 만드는 사회현상이라는 것은 더욱 복잡하기에 수치화하기 용이한 형태의 단순한 질문들로는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복잡한 현상 내에서도 일정한 경향성을 수치로 파악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양화 된 데이터가 지닌 오류 가능성, 더 나아가 폭력성에 대해서 늘 경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오늘날 통계는 종교이다.
대개 사람들은 사회과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최대한 숫자로 표현된 결과를 중심으로 서술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사회과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특히 고교 현장에서 만나는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객관적 과학이 곧 수의 세계로 이뤄져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논리는 실제로 문과 비선호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많은 부분 문과 비선호는 취업률과 관련이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론 수의 세계는 아름답다. 문제는 수의 세계가 곧 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숫자, 통계, 알고리즘 등이 만들어낸 세계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완벽하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는 숫자, 통계, 데이터 알고리즘의 세계를 과하게 믿는다. 수학자 캐시 오닐은 수학이 만들어 낸 결과물과 세상을 대량살상 무기(WMD)라 단언한다. 공정성과 공익은 오직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으로 결코 정량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지도, 구현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수학과 금융의 결탁으로 가공할만한 경제 위기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일자리와 집을 잃고 길에 나앉아도, 그것을 기획하고 만들어 실행한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가치가 반영된 지표들로 순위가 매겨진 대학들은 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노력을 감당해야 하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가상의 브랜드 가치를 좇아 많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입시 과정의 불투명성은 특정 기업의 부를 낳으며 존재하지 않은 교육시장에서는 모두가 피해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교육현장과 노동시장에서 적격자를 찾기 위해, 보험가입 자격을 심사하기 위해 고안된 수많은 복잡한 알고리즘들이 결국 사람들의 행복과 가능성을 박탈하는 많은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간 통계의 함정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우리의 삶 곳곳에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어떠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수학적 모형과 알고리즘들이 기존의 불평등과 모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캐시 오닐과 같은 내부자의 고발이 없다면 무지한 자의 오해와 왜곡 정도로 치부되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문가 혹은 기술자들의 인식 전환과 노력이 필요하다.
수학 모형과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다루는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과 기술에 대한 성찰성을 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너무나 복잡하고 전문화되어 있어 일반인들이 그것의 내용과 원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지식의 대중화, 즉 장기적으로는 지식의 언어와 일상어 간의 간격을 줄이는 프로젝트가 진행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식 자체가 지니는 속성상 개념의 추상성과 복잡성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활동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자세가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연구가 윤리적 문제가 있는지의 여부를 판별하거나 연구결과가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과학기술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한다 해도, 이는 그들 사고 범주 내에서의 예측이자 고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깊이 있게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추지 않는다면 윤리적 성찰이라는 것은 제한적 결과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과학기술집단에서 또 다른 ‘캐시 오닐’을 기대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과학이란 무엇인가,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기술과 사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매우 근본적이고 철학적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갖게 하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교육과정 내에 철학적 사유를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야 하며, 수학, 과학자 집단 내에서 인문사회과학적 훈련의 기회가 의무화되어야 한다. 더불어 저자가 이야기 한 알고리즘에 대한 감시체계가 강구되어야 하며, 그것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다시 학교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누군가에게 학교는 지배 이데올로기 재생산의 현장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사회 성원으로서의 성장 경험을 제공하는 장일 지도 모른다. 어떠한 관점으로 보건 간에 오늘날 ‘과학’에 대한 맹신과 추종은 공통적이다. 정확하고 딱 떨어지는 수의 세계와 복잡하고 난잡하며 많은 가치가 섞여있는 실제의 세계를 구분하면서 과학의 길은 후자를 전자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수학과 통계 알고리즘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교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해석학(hermeneutics)은 학문의 과제를 현상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절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현상은 의미를 끊임없이 맥락을 통해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가 되고, 연구자의 맥락과 현상의 맥락은 상호 교차한다. 오래된 철학 사조를 꺼내 드는 이유는 그것이 위에서 말한 종교화된 수학과 과학을 극복하고, 다양한 수학 모형과 알고리즘의 한계를 이해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회과학을 한다는 것은 해석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현상과 나의 관계, 사회와 과학의 관계 등을 끊임없이 반성해 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 곧 사회과학을 하는 목적이며, 이를 통해 모든 권력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사회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남겨진 몫은 바로 교육의 장에서 해석학적 시각을, 그런 것을 키워주는 학문으로서의 사회과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