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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리 Apr 23. 2018

전환인가, 회귀인가? 그리고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 하위문화 및 사회운동 분석 내의 쟁점

by 현리

 

  후쿠시마 미노리의 ‘조용한 전환’을 읽으며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회운동과 하위문화의 성격에 관한 논쟁과 사회운동에 있어서의 학자의 역할에 관한 고민이었다. 더불어 이런 고민 자체가 나의 ‘꼰대스러움’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성찰도 계속되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특히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는 더 크게 나타나는 게 사실이다. 대학 2학년 때 신촌 클럽 밴드를 대상으로 ‘하위문화’의 성격을 연구하면서 하위문화의 저항성과 전복성이란 이론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답답함을 느꼈다. 기성사회를 비판하는 삐딱한 가사와 그들만의 문화에는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은 있어도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인디문화가 결국 상업자본주의 내에서 머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며 글을 마쳤었다. 

  하지만 저항에 대한 뚜렷한 인지, 지향, 전략과 전술이 부재한 파편화되고 연성화 된 문화담론과 활동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나 자신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과 더불어, 하위문화를 포함한 시민사회 영역 내의 다양한 활동이 반드시 뚜렷한 목적을 지향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했었던 것 같다. 그저 시도와 존재만으로 사회의 다양성이 확보되고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이른바 신사회 운동 확장기, 이른바 ‘학생운동’이 숨어 버린 시기에 대학생활을 했던 나에게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던 선배들의 모습에서 종종 찾을 수 있었던 모순성과 기만성을 문화 영역 내의 다양한 활동에서 발견하는 것은 과연 문제적일까? 

  활동의 성격과 더불어 학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새로운 형태의 시민사회의 다양한 활동들의 성격과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가진 불안정성과 불명확성을 ‘성공’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것인가. ‘조용한 전환’을 읽으며 무엇이 새로운 담론과 활동을 분석하는 학자의 적절한 스탠스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사회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학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르디외는 사회학자가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운동에 도움이 되는 이론적 틀을 제시해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일관되게 ‘사회학주의(sociologisme)’로 대응해왔다. 베르그송과 메를로 퐁티에 영향을 받은 부르디외에게는 칸트적 인식에 근거한 하버마스나 롤스의 이론이 수용되기 어려웠을 법도 하다. 

  이러한 고민이 생긴 데에는 저자의 글에 나타난 3.11 이후 등장한 담론과 사회적 실천의 사례들이 과거 내가 만났던 신촌 인디 밴드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활동의 성패를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활동의 성패라는 것이 애초에 있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수반되었다. 저자 역시 3.11 이후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중적이다. 저자는 3.11 이후 일본 사회의 변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언급한다. 좀처럼 사회문제의 원인을 사회에 두지 않는 일본의 청년들도 데모를 하고 사회적 연대를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자가 여러 차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듯 의제는 여전히 지엽적이며 실천의 동력은 자비와 동정 등의 윤리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주거 담론과 실천, 니트론, 곤카츠론 등에 대해 저자가 가지는 생각은 비판 혹은 의혹에서 이해와 긍정의 시각으로 변화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결국 핵심은 첫째, 일본 내의 변화된 담론과 활동은 일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의 문제이다. 둘째, 분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새롭게 등장한 문화적 담론과 활동들이 사회를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사회운동과 하위문화의 정치성에 관한 논의를 참고해 볼 만하다. 저자가 이중적 태도를 지니고 있듯 학계의 논의도 이중적이다. 하위문화가 직접적, 가시적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히 다양한 정체성 형성과 논의의 지점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사회학자의 분석 방향과 관점의 문제이다. ‘조용한 전환’에는 두 영역의 활동이 모두 제시되어 있다. 하위문화와 사회운동은 개념적 차이가 크지만 본 저서에서 두 활동 모두 3.11 이후 일본 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시민 사회의 변화 사례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두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다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활동과 관련한 학자의 분석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활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대안 제시가 이뤄져야 하는가이다. 이는 하위문화보다 사회운동 분야에서 더 적극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하위문화의 경우 목적 자체가 사회문제 및 모순 극복에 있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의 경우, 학자의 분석은 사회 운동 성공에 대한 대안 제시 및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영역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하위문화 및 사회 운동 분석의 틀이다. 이 역시 하위문화 보다 사회 운동 분야에서의 논의가 더 활발하다. 학계의 논의는 자원동원 이론 등과 같은 구조주의적 분석과 의미, 감정 등을 중시하는 문화주의적 분석, 그리고 이를 융합하고자 하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조용한 전환’이 제시하는 사례들은 저자에 의해 사회 운동으로서의 잠재성과 성향을 보여준다. 저자의 글은 사례를 제시하고 그것이 등장한 맥락을 3.11과 연결 지어 분석하는 정도에 그친다. 또한 실천보다는 담론을 분석하는 쪽에 치우쳐 있다. 추후 이들 논의가 본격적으로 분석되기 위해서는 이론적 틀을 통해 활동의 다양한 맥락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분석 수준과 방향은 구조주의적 분석과 문화주의적 분석이라는 사회운동 분석의 고전적 쟁점 자체가 적용되기 어려운 상태이므로 책을 통해 쟁점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활동, 하위문화이건 사회운동이건 이들 활동의 의미와 가능성을 함께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의 생성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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