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있는 데도 존재하는 건강 격차는 사회적 불의이다. 우리는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고 건강 비형평을 줄이도록 행동할 수 있게 도와줄 양질의 실증 근거가 필요하다. (p.154)
마이클 마멋의 책은 매우 흥미롭다. 만약 이 책이 한 위대한 공중보건학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의료 불평등의 심각성을 소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으로만 채워졌다면 사실 그다지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노력과 주장이 진부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의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무지하며, 대개 엘리트들은 이 책에 나와 있는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빈곤과 질병은 개인의 선택과 습관의 문제라고 인식한다. 또한 대부분의 의사들은 자신의 역할이 현재 환자가 겪는 질병의 생물학적 치료 및 대증치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중 일부는 안정적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생명보다 더 중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와 의료의 관계, 건강과 빈곤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천을 통한 해결을 촉구하는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우리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러한 주장이 오늘날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그런 책들은 잘 팔리지 않을뿐더러 정부 정책에 수용되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논의를 순진한 사람들의 감상으로 치부한다. 현실은 너무나 복잡하며 ‘더’ 중요한 일들이 많기 때문에 ‘영역을 넘나들며 이런저런 지적을 해대는 의사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이 하는 이야기는 간과되기 일쑤다. 이러한 현실에서 결국 관건은 어떻게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것인가이다. 비록 이데올로기는 다르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용하는 언어(같은 사회에서도 집단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가 같아야 의사소통이 이뤄질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할 만한 효과적인 접근 방법을 취한다. 무수히 많은 공격적 인사들과의 토론과 대화를 통해 터득한(?) 마이클 마멋의 방식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을 ‘이상주의자’로 폄하하는 사람들을 설득함에 있어 전략상 매우 효과적인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정상과학은 분명 실증주의이다. 각종 통계 데이터와 경험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강조한다. 실증주의의 안에 있는 사람은 이른바 현상학적, 해석학적 논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논의는 현상학과 해석학에 근거한 틀에서 이뤄졌다. 그렇기에 두 집단은 늘 다른 방향을 보며 서로를 비난해 왔던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할 필연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실증 주의자들은 고전 경제학, 실험중심 과학으로 발전해왔고 이들은 실증주의적 접근이 아닌 모든 것들에게 대해 두드러기 반응을 보인다.
폴 파머(Paul Farmer)를 떠올려 본다. 폴 파머는 빈곤과 질병의 최전선에서 사람들이 겪는 구조적 폭력이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인류학적 시각에서 생생하게 풀어낸다.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다양한 구체적 사례를 통해 국가, 그리고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불편하리만치 깊이 있게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그는 특히 다양한 저서와 강연 활동을 통해 정부, 기억, 그리고 의사들이 건강과 관련하여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하는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한다. 문제는 폴 파머가 인류학적 접근, 즉 해석학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냉정한 이성’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은 파머의 글을 읽고 잠시 감동을 하다가도 바로 반문할 것이다. “정책을 만들려면 ‘객관적(과학적)’ 근거가 필요하지. 감성에 호소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아.” (사람들은 객관, 과학, 중립 등의 개념의 차이와 용처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본인이 과학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마이클 마멋은 철저한 실증주의자이다. 그의 주장은 100% 실증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어설픈 유사 실증주의자들의 허점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실증주의자이기 전에 합리주의자이다. 그는 오늘날 과학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이데올로기 전쟁을 이해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는 필요하다는 점도 안다. 다만 그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합리’와 ‘실증’을 가장한 ‘불합리’와 ‘편견’이다. 책 전반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저한 ‘실증적 근거’를 통해 전개한다. 그가 반반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판 없이 ‘사실’로 여겨졌던 명제들이며,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치부되었던 논쟁들이다. 그가 실증적 자료를 통해 반박한 명제들과 출구가 없이 반복되었던 논쟁 중 인상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 성장 VS 분배
· 질병 원인으로서의 유전 VS 환경
· 기회의 평등 VS 결과의 평등
· 자본주의 VS 사회주의
· 정부의 개입(복지)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다.
· 의료 시스템의 양적 접근이 중요하다.
· 복지와 같은 사회적 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 절대적 빈곤 해결이 상대적 빈곤 해결에 우선해야 한다.
이 외에도 마멋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철학, 경제, 정치, 사회, 의료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던 난제,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언어로 서술되어 결국 정치적으로 이해되고 힘의 논리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 논의들이 실증적 근거를 기반으로 설명되고 있다. 성장은 분배로 자연스레 귀결되지 않으며, 부유한 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국가 국민들보다 더 건강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결국 GDP가 의미하는 것은 제한적이며 사회의 발전과 성장은 그 사회의 건강 형평성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멋의 주장이다.
마멋은 실증주의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로 삼지 않는다. 그의 이데올로기는 오직 인간에게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며, 빈곤 해결이 인류 건강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실증주의는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일 뿐이다.
2. 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
마멋의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아마티아 센’이다. 마멋은 센으로부터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받는다. 공리주의, 경제학의 지불 의사 방법론 등의 문제를 차례로 제시하며 정치적 우파가 강조하는 자유라는 것의 의미를 성찰하는 과정에 ‘센’의 ‘역량’에 관한 논의가 사용된다. 자유의 침해란 우파가 주장하듯 복지를 통해 국가가 제공하는 물질적 지원으로 개인의 자존감에 상처가 나는 문제라기 역량의 박탈의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심리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개인이 역량을 박탈당하고 있다면 그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즉, 삶에 있어서의 자유도가 낮아는 것이다.
이는 비단 빈곤층 외에도 가난한 나라나 부유한 나라의 경사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센에 따르면 ‘소득의 상대적 불평등은 역량의 절대적 불평등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오늘날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GDP 순위 11위인 대한민국은 책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사회 속성과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는 편에 속하는 사회이다(마멋의 책에서도 한국은 주로 긍정적 사례로 언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심각한 상태의 박탈감과 좌절감을 호소하는가. 그것은 물질적 여건과 심리사회적 여건 간의 괴리와 가파르게 증가하는 빈부격차에 따른 상대적 빈곤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들의 역량 박탈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분석이 필요하다.
오늘날 양성평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 ‘메갈’이나 ‘꼴페미’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제와 가정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른다. 오히려 과거에는 현실은 어려웠지만 양성평등은 반박 불가한 명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양성평등에 대한 다양한 반박 논리들이 존재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 여성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힘든 분위기이다. 마멋의 사례에서 콘퍼런스나 회의에 등장하는 사례나 인물은 주로 남성이 많다. 반면 상상 모임에 등장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주로 여성이 많은 이유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멋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역량강화가 답이다. 마멋은 역량강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환경적 여건을 창출하여 건강 형평성을 증진하는 것을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영유아기의 양호한 발달, 양질의 교육, 양호한 고용 여건과 노동 여건, 노년의 생활 여건, 회복력 강한 지역공동체의 발달을 잘 지원하는 ‘국가’를 강조한다. 대개 이런 주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은 ‘역량 강화의 재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이다. 작은 정부가 진리이며 그러나 많은 국가가 부유하지 않아도 정책을 통해 충분히 건강 형평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많은 실증적 근거는 차고 넘친다. 정치 우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의 식상한 레퍼토리에 대해 유엔의 <인간개발 보고서>는 ‘일자리 없는 성장, 무자비한 성장, 목소리가 없는 성장, 뿌리 없는 성장, 미래 없는 성장’에 관한 비판은 좋은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는 복잡한 논의보다는 마멋의 주장대로 건강형평성에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그 어떤 사회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첨예하기에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 합의를 형성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누구도 ‘국민건강, 국민행복’의 문제를 중요하지 않다고 볼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건강형평성 증진을 중심으로 무엇이 건강을 해치는 것인가에 대한 분석과 해결, 그리고 그것을 위한 국가의 지원과 사회적 지지가 이뤄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마멋의 ‘건강격차’는 유사 과학과 가짜 실증주의에 경도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전환시켜 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