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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Apr 14. 2024

미적 관조는 고뇌를 줄이는 일에 특별히 관여할 수 있다

Plato Won 作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예술에서 찾는 철학자다.


이 세계는 '삶의 의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예술과 음악에 있다고 봤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나 예술 작품을 보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고뇌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낀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단순히 삶의 고통을 순간적으로 위로하는

도피처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자 세계의 근원인

의지를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예술적 대상에 대한 미적 관조는

대상을 사사로운 관심이 없이, 어떤 목적도 없이,

특별한 욕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느끼며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아름자운 자연이라는 객관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는 인간은 자신이 처한 유불리의 처지를

잊고 고통스러운 자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이때 고뇌의 세계는

사라진다.


경이로운 자연의 장관 앞에 마주한 인간은

숭고미를 느끼고,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작게 느껴져,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고뇌는 우리 마음속에서만 자라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된다.


미적 관조란 이 세상을 사사로운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미적 관조를 즐기게 되면

세상의 고뇌에서 잠시 벗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고,그 속에 숨겨진 순수함을 보게

된다.


대상이 어떤 것이든 순수함을 보게 되면

아름답고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것이 '숭고미'다.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에서도 느낄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인류 공동체를 위해 행하는

아주 소소한  선한 의지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숭고미다.


숭고미가 아름다움의 본질이고,

아름다운 대상과 시간을 보내면 고통은

사라지게 된다.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삶에 대한 욕망 없이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볼 때 영원히 불변하는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플라톤은 대상의  본질,

'이데아'라고 했다.


대상을 사사로운 계산 없이, 어떤 목적도 없이,

의욕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이 미적

관조이고, 미적 관조를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고

고뇌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이성을 잠재우고 죽어있던 감성을 춤추게

하는데 고뇌가 있을 리 있겠는가?

마냥 즐거운 것이지.


좋은 음악을 듣고,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마주하고, 좋은 문학작품을

음미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과 시간을

함께할 때, 이를 통틀어 '미적관조 활동'이라 한다.


이런 미적 관조 활동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잠시라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고대 그리스 , 아테네 시민은 디오니소스 극장

모여 비극을 관람하면서 연극 속 주인공이 처한

비극적 상황에 몰입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체험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느낀다. 바로 그때 오히려 이성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초월을 체험

하게 된다. 관객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불안, 우울,

슬픔 등의 감정이 등장인물이 겪는 비극적인 상황

이나 비참함에 공감하면서 해소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예술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정화작용, '카타르시스'다.


니체는 그의 예술 철학에서 예술

다오니소스적 삶으로 설명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주의 신이자 여러 번 죽음과

생을 경험한 디오니소스처럼 인간도 술에 취할

때 잠시나마 삶에 따른 고통을 잊고 거듭나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술,술 하는 것이다.

술을 그냥 퍼붓듯 마시면 머리만 아프지만,

음미하며 제대로 마시면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처럼 예술도 덧없는 삶의 시간에서 벗어나

고통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한다.


"예술은 삶의 꽃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 참을 수 없다면

예술을 통해 가라앉힐 수 있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예술활동을

'미적관조 활동'으로 치환해보자.


이른 새벽, 세상이 온통 고요할 때

특별한 사심 없이 사유와 관조의 시간을 가지면

자신이 처한 일상의 고뇌는 사소하고 잡스러운

것이 된다.


 관조를 품고 집을 나서 MTB로 산을 오를 즈음

마주하는 여명는 자신을 경외감으로 이끌고,

그 경외감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열었던

페트라르카의 시을 읊조린다고 상상해보자.


"인간은 산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바다를 보고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경탄하지만,

정작 자신 내면의 본질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


새벽 시간을 누가 감히

돈과 권력과 명예 살 수 있단 말인가.


새벽은 오롯이 부지런히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의 것이다.


세상이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

귀를 쫑긋 기울이고 관조하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여명이 총총거리면서

떠오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여기에 사심이 개입될 여지는 없으며

덧없는 욕망이 끼어들어 삶의 고뇌를 자극할

이유도 없다.

 

미적 관조는 

대상의 순수함을 꺼집어내어 그 아름다움과

마주하는 사유활동이다.


산 정상에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꽃을

산을 내려올 때서야 볼 수 있는 이유는 

덧없는 욕심을 많이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미적 관조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두 개가 아니고 단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정상을 힘들 게 올라갈 때도

아름다운 꽃을 보게 하는 힘,

그것이 미적 관조의 힘이다.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순수하고 담백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닮고자 한다면

자연과 자주 마주하면 된다.


미적 관조는 인생에서

고뇌를 줄이는 일에 특별히 관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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