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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물딱이 Apr 28. 2020

<텅 빈 옷장 앞에서>

나는 늘 왼쪽 길을 택했다. 


그건 약간 쉬운 길이었다. 명문대를 고집하는 엄마의 성화에 이과진학은 의약 계열과 유명공대들이 빠지고 남은 쪽에 내 자리 하나는 있을 법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또 과를 고를 때도 취업이 잘 된다는 그래서 대기업 가기 쉽다는 길을 택했다. 왼쪽 길은 언제나 나에게 편한 선택지들을 던져주는 남의 길이었다. 


왼쪽 길을 간다는 건 일종의 게임 같은 것이다. 1단계 공부, 2단계 취업을, 3단계는 결혼, 4단계 육아까지 열심히 또 정도껏 하다보면 금화도 모으고서 5단계에서 텅 빈 옷장을 마주하게 되는 아주 보편적인 길이다. 그 텅 빈 옷장 앞이 지금 나의 왼쪽 길이다. 


이 길이 끝이라고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말하는 옷장은 텅 비어있는 내 자아였다.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라며 버린 손때 묻은 책들과 고민가득한 일기장, 매시간 충실하지 못했던 추억들은 나를 물음으로 던져주었다. 


처음에는 그 공허함이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내가 일을 한다면, 내가 돈이 더 있다면, 내가 더 사랑받는다면 하지만 이내 그 가정법들은 빽빽한 일상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어른은 옆구리에서 죽음을 가끔씩 꺼내보는 사람이렸다. 


조숙해서 왼쪽 길을 택했듯이 나에게는 권태가 일찍 찾아와 너무 자주 거울에 내 남은 날을 비춰보는 늙은이가 보였다. 나는 줄곧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글쓰기의 길은 가난하고 또 낯뜨거운 길이라 여겨서이다. 내 마음을 온전히 쏟아 보이는 건 나체를 보여주는 것만큼 부끄럽고 또 글이 넘쳐나면서 동시에 읽히지 않는 시대에 글쓰기를 택하는 건 왼쪽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책을 읽으면 두근거려 작가에게 감사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신간을 읽을 때 제일 먼저 작가 연혁을 보며 이런 사람이면 작가가 될 수 있겠거니 맥을 짚어보면서 나는 내 길에서 종착지만을 짚어보며 애써 모른척하고 있었다. 


옷장은 짐을 챙겨 내 길을 떠나라는 신호였다. 게임이 아닌 내 삶을 준비해 시작하라는 신호탄. 텅 빈 옷장에서는 몇 가지 짐 꾸러미가 없었지만 본디 여행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단 한걸음부터. 나는 작은 나뭇가지로 옷걸이를 만들어두고 작가로의 여행을 향했다. 이미 걸음은 시작되었고 나는 이 길 위에서 조금씩 자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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