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정민 Jun 11. 2020

육아서/육아에세이::울거라, 나의 아기야

           


얼마 만에 잔 낮잠인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고 나서부턴 혼자 있는 그 시간이 무척 아까워 낮잠 따위는 자지 않았다. 조금 피곤해도 참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어차피 몰아서 저녁에 자면 되니깐. 


그런데 오늘은 책상 앞에 엎드려 졸아버렸다. 마치 매일이 고된 수험생처럼. 


피곤의 원인은, 추측건대 오늘 아침 아이의 징징거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징징대는 소리를 들으며 참을 인을 열심히도 그렸던 탓이지 않을까. 낮잠마저 아이 탓으로 돌리려 하는 비겁한 엄마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쟤들 탓이 맞는 것 같다.




새벽 4시 반. 조금 일찍 일어났다. 어제 10시쯤 잠든 탓에. 보통 6시간 정도 잠을 잔다. 나에게 잘 맞는 수면시간을 작년 2월, 미라클 모닝을 하면서 찾아낸 것이다. 새벽형 인간이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여태껏 살아왔는데, 아침형 인간으로 사는 것이 나에겐 여러모로 긍정적인 힘을 준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늦게 일어나는 날은 오히려 몸과 기분이 찌뿌둥 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늦어도 6시쯤엔 하루를 시작하는 나를 보며 지인들은 말한다. 


'정말 아침에 긴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겠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 아이들의 기상시간은 보통 6시 반에서 7시 사이니깐.


자비라곤 없이 주말마저 그쯤 되면 눈을 뜬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땐 5시 언저리가 되면 일어나곤 했으니깐 아침잠 시간이 길어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내 기준에선 여전히 아이들의 기상시간은 야속하기만 하다.  


8시까지 푹 자주면 좋으련만. 도대체 왜 일찍 일어나는 거야?라고 하며 새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항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일. 엄마가 일찍 깨면 아이도 일찍 깬다나. 에이 설마 하고 믿지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 남편과 내가 늦게까지 잠을 자는 날이면 두 아이 역시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곤 하는 걸 직접 경험한 뒤엔 아이의 이른 기상은 우리의 탓이라 여기기로 했다. 


남편 역시 6시 반쯤 출근을 하니 두 아이는 허전한 거다. 부모의 든든하고 따스한 품이 없는 잠자리가 낯선 것이다. 설핏 잠에서 깼는데 엄마나, 아빠가 만져지지 않아 놀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덩달아 일찍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니 엄마인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4시쯤 일어나게 되는 날엔 쾌재를 부른다. 야호!



두 시간을 활활 불태웠다. 6시 반쯤 되면 아이들은 깰 거니깐. 그때부터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할 수 없으니깐.


아니나 다를까. 알람시계처럼 아이들의 소리가 딱 그 시간, 울려 퍼진다.


막 잠을 깨서 퉁퉁 부은 눈과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 조그마한 입도 입이라고 냄새를 폴폴 풍기며 '잘 잤어요?'하고 나에게 오는 아이. 끌어안기 딱 좋은 몸집과 보드라운 피부 결. 무슨 꿈을 꿨냐고 묻는 엄마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귀여움 때문에 일찍 일어난 아이가 야속하지만 예쁘기 그지없다.


그렇게 평온하게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니 되는 줄 알았다. 



다음 달이면 세 돌이 되는 두 아이 중 둘째는 요즘 무엇 때문인지 울음과 짜증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 


좋은 말로 자신의 요구 사항을 말하면 좋으련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울기부터 하는데 그런 징징거림 앞에서 의연한 엄마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다. 한번, 두 번, 세 번... 울음과 짜증이 쌓일수록, 나의 인내 게이지는 차오른다. '울지 마. 도와줄게. 울지 않고 말할 수 있잖아.' 이렇게 아이를 달래보지만 툭하면 짜증과 울음이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이때쯤 아이들은 원래 다 그런가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땐 아이의 문제행동에 괜히 겁부터 먹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해 줘야 할까?' 싶어 책도 인터넷도 뒤져보았던 것 같다. 사실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었는데 초보 엄마는 불안하기만 한 것이리라.


아이를 삼 년쯤 키우니, 그럴 시기가 있더라는 말을 믿게 되었다. 그래. 울고 때 쓰는 것도 시기가 있나 보다. '안돼. 싫어. 하지 마'라고 일단 지르고 보는 것도 그럴 때가 있는 거겠지. 그러지 않았던 아이의 변화된 행동을 보며 자라고 있는 중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렇게 품어낼 수 있는 너른 마음이 나에게 생긴 것처럼, 아이 역시 자라는 중간중간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인가 보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선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기도 하고. 


아무리 그렇게 내 마음을 다독이며 아이와 마주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시작되는 둘째의 울음 앞에 선 머리가 지끈댄다. 이유는 다 있겠지. 사과주스를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물 한잔 먼저 먹으라고 말한 엄마의 대답에 화가 났을 수도 있고, 첫째 아이가 자신을 툭 하고 실수로 친 것도 이유일 수도 있다. 안기고 싶은데 밥을 한다고 기다리라고 말한 엄마에게 야속함을 느꼈을 수도 있고, 오래오래 안아주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어린이집에 입고 가고 싶은 옷(잘 때 입는 나시와 팬티 사이즈의 반바지)이 있는데 엄마가 허락을 해 주지 않아서 뿔이 났을 수도 있고. 그러니깐 한마디로 '제 맘대로'되지 않은 것에 성질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얘가, 왜 이렇게 변했지? 안 하던 짓을 하네!' 콧바람을 씩씩대며 혼잣말을 웅얼거린다. 



둘째의 성품은 인자하기로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온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인자한 놈"이라고 인정해 주셨다. 언제나 '형 같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어떻게 저렇게 마음이 깊을 수 있냐는 칭찬을 매일 같이 들었다. 첫째 아이가 오랜 시간 고집을 부리지 않아도 됐던 이유는 둘째의 인자한 배려심 때문이었다. 둘이 크게 싸우지 않고도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둘째 덕분이었다. 과묵하고 배려심 많았던 아이였다.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아이였다. 그런 둘째에게 요즘 '화'가 많아진 것일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일까.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한 것일까. 변했다고 생각하며 둘째의 우는 얼굴을 야속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아이의 울음 뒤에 숨겨진 진짜 마음이 궁금해진다. '진짜 마음이 뭘까?'라는 질문은 치솟던 화를 쑥 하고 가라앉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 너도 풀 때가 있어야지!' 


기질적으로 순한 아이였지만 어쩌면 만나는 사람마다 '인자한 놈, 착한 놈, 양보도 잘하는 놈'이라고 이야기하는 탓에 자신도 모르게 행동과 감정을 자제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둘째 아이의 마음엔 응어리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인 나는 낯설어진 아이의 모습을 보며 괜히 이 생각, 저 생각 해 본다.




'착하지 않아도 괜찮아. 울고 싶으면 울고, 화가 날 땐 화를 내야지. 짜증이 나는데 어떻게 네 살 아이가 그걸 참아내고 있을 수 있겠어?'라고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니, 대신 다른 말로 한다. 


'짜증 내도 되니깐 엄마한테 이유는 말해줘'라고. 


착한 아이로, 배려심 많은 아이로 자라고 있는 아이를 보며 한때 기특함을 느꼈다. '쟨 어떻게 아기가 저런 걸 양보할 수 있지?' 호호 웃으며 아이의 배려심에 감탄하곤 했다. 어쩌면 어른들의 모든 반응이 아이의 마음에 부담감을 안겨줬을지도 모르겠다. 


막무가내에 천방지축, 자신의 감정에 늘 솔직한  첫째 아이가 짜증 내고 울었다면 '변했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거다. 원래 그런 아이였으니깐. 그래놓고 둘째의 짜증과 울음에 놀라는 건 잘못된 반응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건 둘째 아이를 향한 정서적 폭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 



'고유한 아이'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라는 아이에게 '너다운 게 가장 근사한 거야.'라고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내 마음속엔 나도 모르는 새에 아이에 대한 기대치라는 것이, 바라는 모습 같은 것이 생겨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아이의 감정을 억압하고 욕구를 억눌렀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타인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가면을 쓴 채, 나의 진짜 모습과 감정은 숨긴 채 타인을 대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아직은 그러지 않아도 될 때라고 생각한다. 순진 무고함과 순수함으로 제 마음을 선명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때이지 않나. 



낮잠을 잘만큼 아이의 짜증에 고단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내 응석 좀 받아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응석을 부려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둘째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 때문에 엄마가 피곤해 죽겠어! 그만 좀 해!'라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엄마한테 안 풀면 어디 가서 그러겠니'싶은 측은지심이 생겼다고나 할까. 


나는 내 불만과 분노를 이렇게 글로 잘 풀어내고 있으니, 너희는 너희만의 분노 해소법을, 타인과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서도 화를 풀어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를 수 있을 때까지는 엄마에게 화를 풀어도 좋다고, 짜증 내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저도 제 마음을 어쩔 줄 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웃었다고 울었다가 하는 것 같은데 뭐 어쩌나 싶다. 부모의 따스한 품과 다정한 속삭임이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면 화 좀 받아 주지 뭐. 착한 아이로 자라야 한다는 말 대신 네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로 크면 좋겠다는 말을 조금 더 자라면 해 줘야지. 분노는 억누르는 것도, 펑 하고 터뜨리는 것도 아니라 잘 풀어내야 한다는 것도 천천히 알려줘야지. 


지금은 마음 껏 울어라. 4살 나의 아기야.  



                                                























매거진의 이전글 육아에세이:: 작은 것으로 가득 찬 5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