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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Aug 08. 2020

지친 하루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

잘했어,라고 토닥이면 곧바로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괜찮아, 라는 위로에 왈칵 내 안의 모든 슬픔이 쏟겨 나올 것 같은 그런 날이 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봐.’ 나는 나에게 실망하고 있는데. 잘했다 라니. 괜찮다 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만히 듣고 있게 된다. 달콤하지만 단호한 그들의 목소리에 마음의 땅굴을 파고, 또 파며 깊숙한 어느 곳까지 들어가고 있던 나는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앉는다.

차마 놓을 수 없어 꽉 붙잡고 있던 꿈의 끝자락을 놓으려는 찰나, 나에게 ‘고작 이런 일로 되돌릴 거야?’라고 야단치는 듯, 힘을 주듯, 손을 이끄는 세 남자가 있다.  

‘오늘 이 기분 때문에 모든 걸 되돌릴 순 없잖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나에게 꿈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내 안에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평생 ‘해야 할 일’만 하고 살아온 내게 처음으로 ‘진정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구름 위를 걷는 듯 기분도, 생각도 몽실몽실거렸다. 꿈이 있는 인생을 산다는 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기대, 세상을 향한 무한한 설렘 같은 것이 가득 차오른다는 뜻인 것이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꿈’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때문에 나는 때때로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날 수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기도 하구나.

단 한 번도 꿈을 꿔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렇게 기대와 실망 사이에 놓였다. 작은 공모전에서 입상하여 상금을 받았을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실망 쪽에 더 많이 기울어진 채 지낸 날이 많았다.  

그래도 쓰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냐며 나를 달래곤 했는데, 내성이 생긴 내 마음은 더 이상 나의 위로 따위에 괜찮아지지가 않았다.

괜찮지 않은 마음으론 아무것도 다시 해낼 수가 없었다. 작은 노트에 짧게 쓰곤 했던 일기조차.


      

엄마가 되고 난 뒤, 거의 모든 것을 아이에게 내어주어야 했다. 일어나서 다시 잠드는 순간까지 나는 아이를 향해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 자신이 점점 흐릿해져 간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짜증, 이유 모를 분노, 나도 모르겠는 내 마음. 좋은데 싫고, 사랑하는데 미워지는 상태.


도대체 왜, 나도 나를 모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점점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낯설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내가 아닌 나. 나는 온데간데없고 ‘엄마’만 서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리고 꼬박 1년이 지나고 난 뒤, 하고 싶은 일이 생겨났다. ‘작가’, 그것도 ‘알아주는 작가’


     

그 꿈을 향해 내달렸다. 아이를 키우는 일 역시 더불어 생기가 넘쳐났다.

온전히 나로서 선명한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토록 생산적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내 삶으로 끌어당기는 일이었다. 엄마인 나도, 나로서의 나도 결국엔 ‘나’라는 것을 부대낌 없이, 더부룩함 없이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꿈을 꾸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토록 위력이 넘치는 일인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 대한 실망의 크기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커져갔다. 설렘과 기대만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실망과 슬픔 같은 것들 역시 함께 자라나다니. 내 계획대로, 생각대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꿈 앞에서 몇 번이고 엎어져 있었던 기억이 있다.      


출간 계획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았을 때,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려고 해도 도무지 누군가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망작만 자꾸 쓰게 될 때. 조그마한 공모전 하나도 입상하지 못할 때. ‘그런 건 왜 하는데?’라는 타인의 냉소적인 반응 같은 것들에.   

  

그러면서도 놓을 수가 없었다. 꼭 붙들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으면 초점이 정확하게 맞춰져 찍힌 사진처럼 내가 선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을, 내 생각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보게 만들어주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간절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것. 글로 밥은 아니더라도 간식 정도는 살 수 있는 인간이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더라고.     



그때, 우연히 들은 곡이 있다. 윤종신, 김필, 곽진언의 <지친 하루>.

그리고 그 이후 내 꿈이 미워질 때, 꿈 하나도 이루지 못하는 내가 싫어질 때, 이 곡을 튼다.     

잔잔한 멜로디가 끓는 듯, 앓는 듯 부글대는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그리고 이내,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좋은 그곳이 나의 길이라고. 고작 이 기분 때문에 모든 걸 되돌리진 말라고, 옳은 길 따위는 애초에 없다고.  

그럼 나는 딱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뱉는다.

‘내가 걷는 이 길을 옳게 만들어 보겠다고.’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셀 수 없을 만큼 좌절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다시 일어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저앉았다가 일어설 때마다 내 꿈에 대한 확신은 단단해졌고, 아주 조금 꿈을 향해 발을 뻗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시무룩해져 있을 때마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그만하면 됐다고. 돈도 뭣도 안 되는 일을 오래 붙들고 있어 봤자 오히려 손해일뿐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내가 나를 일으킬 때마다, 다시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점점 선명해졌다는 것을.

나로서, 나답게 살아갈 용기를 얻곤 한다는 것을.

내가 나를 한 뼘 더 믿게 되었다는 것을.

     

오늘도 틀었다. <지친 하루>를.

이젠 지치지 않은 날에도 듣곤 한다.

그냥 그들의 목소리가 그리워 틀어놓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못 들은 걸 보니, 강해지긴 했나 보다 그러면서.

‘누가 그게 옳은 길 이래?’라는 그의 목소리에 ‘맞아! 그렇지.’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글을 쓴다. 작은 편지지에.

'꿈을 꾸게 된 나의 친구에게, 선물하는 노래'라고.

 아, 브런치 ‘나도 작가다’ 3차 공모전까지 떨어지면 또다시 나를 위해 이 노래를 틀 것 같은데 정말이지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위로곡이 아닌 축하곡이 되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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