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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elraum Dec 28. 2022

임금피크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양복의 숨’이 조금 헐거워졌지만 아직 살아있습니다.

“세월에 저항하면 주름이 생기고, 세월을 받아들이면 경륜이 생긴다”라는 <문장과 순간>의 저자 박웅현 님의 말이 따뜻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하루 24시에 비유하면, 여러분의 나이는 몇 시에 해당될까요? 100세를 기준으로 4등 분해 나이를 적어보고 그 옆에 시간을 적어볼까요? 100세가 24시라면, 25세는 아침 6시, 50세는 낮 12시 정도 될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75세는 몇 시쯤 될까요? 저녁 9시쯤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계산해보면 오후 6시(24/4 ×3)가 됩니다.


53세, 이제 정오를 지나 한창 일할 시간이군요. 이렇게 생각하니 해야 할 일이 많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하지만 ‘53세’라는 나이는 직장에서 위축되는 숫자입니다. 100세 시대라고 우겨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50세’가 넘으면 피오르(Fjord)의 좁고 깊은 후미처럼 ‘임금피크제’가 눈 안에 들어옵니다. 정년은 보장하지만 임금은 삭감하는 제도, 정년연장과 임금삭감을 맞교환했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용어자체에 오해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임금이 ‘peak’, 정점이라는 뜻인데 그런가요? 실제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회사는 ‘peak’가 아닌 ‘off-peak’에서 임금을 순차적으로 삭감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저는 ‘임금피크제’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저 단어 함의와 취지가 그렇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밥벌이를 하고 있지 않냐고 얘기한다면 너무 비굴한 것일까요?


사무실에는 젊은 직원들이 제법 있습니다. 대부분 20대와 30대로 경력직 IT개발자, 디자이너, 나이만 젊은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도 유연합니다. 가끔 제 입에서 ‘젊은 직원’이라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그럼 난 늙은 직원인가?’ 하면서 웃음과 슬픔이 잠시 공존하다 사라집니다. 상대적인 나이에 위축되기 때문이겠지요. 아마 그 직원들은 화석 같은 인물이라고 저를 어려워하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 흰머리도 한몫을 하는 것 같네요. 그렇다고 젊어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염색을 하지는 않습니다. 잠깐의 젊음을 빌려오기보다는 굽은 비포장도로에 내리는 첫눈의 ‘설렘’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한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했던 박웅현 님은 지금은 “나이는 속일 수 없다”고도합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젊은 패기가 필요했고, 또 다른 시점에는 받아들임과 체념도 필요한가 봅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나이테처럼 연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늙은 나이테는 중심 쪽으로 자리를 잡고, 젊은것은 외곽 쪽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중심에 있는 늙은 것은 말라서 아무런 하는 일 없이 수 백 년의 세월을 이어가지만, 그 굳은 단단함으로 나무를 지탱한다고 생물학에서 배웠습니다. 젊은 나이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안쪽으로 밀려나고 다시 나무의 외곽은 젊은 나이테로 교체됩니다. 나무는 그렇게 늙음과 젊음이 공존하고 포개져 있는 것인가 봅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도리어 제구실을 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무리를 지키는 것은 ‘가모장(家母長)’인 경우가 많습니다. 코끼리는 ‘가모(家母)’의 경험과 지혜가 없으면 먼 거리를 이동하여 물과 먹이를 찾지 못합니다. 고래도 늙은 ‘가모장’이 무리를 이끕니다. 젊은것들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위험이 닥치면 맨 앞에 나가 무리를 지킵니다. 저는 젊은 직원들이 희생정신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때 나마 ‘리더’였지만 이제는 낮은 지위로 내려가는 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달, 함께 근무했던 선배가 ‘임금피크제’를 앞두고 퇴직을 결정했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설렁탕을 먹었습니다. 뽀얀 국물과 선배의 얼굴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슬픈데 기뻤고, 아쉬운데 미련이 없어 보였습니다.


어디서 들었던 얘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연체동물 중 갑각류는 성장하기 위해서 껍질을 벗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갑각류는 껍질의 탈피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지요. 이때 갑각류는 아주 약해지는 상태라고 합니다. 천적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상처도 납니다. 갑각류가 성장하는 때가 가장 약해져 있는 순간입니다.


퇴직을 앞둔 선배가 갑각류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회사라는 단단한 껍질을 벗고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가장 약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라고요. 그냥 스치기만 해도 아프고, 불안한 순간 어쩌면 지금이 선배에게 더 큰 성장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명함은 직책과 직위를 나타냅니다. 명함이 사라지면 직업이 없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퇴직자는 꼼짝없이 실업자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퇴직자가 실업자인가요?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퇴직자는 실업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양복의 숨’으로 살았습니다. 양복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젊었고 프로였습니다. 지금, ‘양복의 숨’이 조금 헐거워졌지만 아직 살아 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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