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난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시간이 메말라 갈 때 나는 숨고 싶었고 도망쳤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의 부고가 들려왔다. 내 인생에 처음이자 큰 이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물을 곧잘 흘렸던 내가 원래 눈물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눈물이 나지 않은 것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울어야 하는데 울어야 하는데” 하면서 ‘꺽꺽’ 소리가 안으로만 맴돌았다.
한동안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약간의 책임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불안한 눈빛으로 요양병원(돌이켜 보면 여기는 ‘불안한 감옥’ 같았다) 입원을 거부했었다. 그렇게 불과 채 두 달도 못돼 아 버지는 생의 마지막 줄을 놓으셨다. 마지막 임종 회피 순간(너무 무서워서 그랬던 것 같다)은 줄곧 지금도 내 안에 화인(火印)으로 남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지인들은 내게 당분간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오겠지만 시간이 곧 해결해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위로의 말 정도로 받아들였다.
국민학교 1학년 즈음 셋방살이를 하던 우리 집은 한 방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해가 넘어가고 모두가 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지만 나는 주인집에서 TV를 보느라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퇴근 후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다음날 할부 계약으로 다리가 넷 달린 TV를 안겨주셨다.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물론 어린 내가 부자라는 개념을 알리 만무했지만 주인집에 존재하던 TV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느낌을 가지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군대 시절 위생병이었다(‘의무병’이었지만 아버지는 내게 위생병이라고 하셨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는지 한 때는 의문이기도 했지만 어머니 그리고 나와 동생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링거(Ringer) 주사를 직접 놓아주시기도 했다. 내가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이런 소소한 기억들을 여전히 소환해 내려고 했던 것은 내가 아버지를 진심으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아쉬움 때문이라는 것을 <좋은 이별,김형경>이라는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내면에 여전히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슬픔’, ‘죄책감’이란 감정을 꾹꾹 눌러 새기고 있었다. 이별은 존재의 상실이다. ‘프로이트’는 1차 세계대전 후 가족을 잃은 사람들 대상으로 면담한 결과 이별을 잘하지 못하면 병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슬픔은 내면에 깃든 생각과 감정을 의미하고 애도는 슬픔의 감정을 외부로 표현하는 일련의 과정과 상태”라고 했다. ‘슬픔’과 ‘애도’는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KBS 생방송 아침마당 강연을 통해 그리고 글로서 슬픔을 토해 냈고 독서 같은 매개체를 감정의 도피처로 삼기도 했다. 이것이 나만의 ‘애도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애도는 새로운 자기 체험이 생겨날 수 있게 한다. 충격받는 사람의 삶에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자기와 세계에 대한 체험을 이루게 하는 감정이다” 독일 심리학자 베레나 카스트의 책 <애도>의 한 구절이다.<좋은이별>에서 발췌
어떤 대상과 이별할 때 느끼는 경험의 감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별은 슬픔과 상실, 증오 그리고 두려움을 동반한다. 내가 아는 한 이별의 어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좋은 이별’이 가능한 걸까? 이 형용모순(形容矛盾) 같은 낱말은 실재하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법한 그래서 깊은 목구멍에서 토해내지 못한 사연과 서사(敍事)를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프로이트’는 이별의 대상을 ‘부모, 형제, 연인만이 아니고 어떤 추상적인 것 명예, 직위, 돈, 이데올로기까지 그 범주가 넓다고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떠나보내면서 살고, 궁극에는 ‘나’도 떠난다. 삶이란 상실의 연속이다.
‘퇴직’도 밥벌이의 상실이고 회사와의 이별이다. 퇴직은 안전한 공간과 환경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이민처럼 쇼생크같은 회색감옥을 남긴다. 밥벌이와의 헤어짐에도 좋은 이별의 서사(敍事)가 있어야 한다. 퇴직할 때 좋은 이별이 드물다.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의 심각한 오해가 증오, 분노, 상실감으로 표출된다. 이런 애증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내 안에 애증의 감정들이 막혀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하면 자존감 상실, 자기 비하와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고여 있는 분노와 슬픔의 물길을 뚫어 상실의 강이 잘 흐를 수 있도록 자신만의 ‘애도의 과정’을 만들고 밥벌이의 단절과 이별을 이겨내면 내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다.
나의 실존은 회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달려있다.
출근길, 나뭇잎 말라가는 냄새가 바람에 날리어 콧속으로 들어왔다. 서걱서걱 되는 나뭇잎은 이별을 머금은 상실에 대한 슬픔의 소리처럼 들렸다. 상실과 아픔에 대한 애도는 좋은 이별을 남긴다. 나무는 스스로 불태웠고 겨울 나목(裸木)을 부른다. 겨울 나목은 벌거벗은 힘과 원초적 아름다움으로 살아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