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느 수준의 글을 쓰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쓰고 있는 그 자체로 이미 멋있다”라고 강원국 작가는 말했다. ‘쓰고 있는 그 자체’, 라는 말이 큰 용기가 되었다.
언제부터일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 다닐 때 백일장은 고사하고 일기조차 제대로 써 본 적 없던 내가 무슨 바람이 들어 이런 생각을 했을까?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 에서 글을 쓰는 이유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을 적절한 낱말이나 배열을 통해 묘미(妙味)를 느끼는 열정은 내게 없을 것이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역사, 정치적 목적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아마 나는 누군가에게 보이고, 기억되고 싶은 이기적인 욕망의 발동(發動)으로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닐까? ‘오웰’은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이것이 동기가 아닌 척하는 것은 허위라고 했다.
고로(故로)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지극히 정상인 셈이다.
책 한 번 쓰지 않은 내가 글쓰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자니 솔직히 부끄럽기 그지없다. 글을 쓰고 싶은 ‘문학 중년’들이 많을 터이니, 오히려 유명 작가보다 초보자인 나의 글쓰기에 대한 상상(想像)이 더 공감되고 소구력(訴求力) 있지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망상(妄想)의 힘으로 한 땀 한 땀 밀면서 써 내려가고 있다.
용서해 주시기를 ……
작년 겨울, 매일의 삶이 핍진(乏盡)하고 궁핍할 때 ‘나의 가치와 존재를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 보기로 했다. 쓴다고 쓰이는 것이 ‘글’일까 마는, 가끔 신문에 글을 쓰고 있으니 제법 글재주는 있지 않을까?라는 계속된 나의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솔직히, 이제 와서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돌이켜보면 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졸고(拙稿)였음을 고백한다. 어줍은 지식을 토대(土臺)로 글을 썼다기 보단 흰 여백에 그냥 쏟아 낸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라는 생각에 이를 즈음 “내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고 했던 ‘헤밍웨이’의 말(言)이 습기 없는 가을바람처럼 내 생각을 더 가볍게 해 주었다.
주말에 가까운 북 카페를 방문했다. 매주 방문하는 이곳은 서점이기도 하지만 빵과 커피 그리고 영화까지 볼 수 있는 지역 대표 문화플랫폼이다. 주민들의 쉼터고, 작가 지망생들이 작가들과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며, 글을 쓰는 공간이기도 하다. 연령층도 다양해서 20, 30대 젊은 청년과 50대 중·후반의 중년들이도 많다. 수다를 떠는공간 같지만 책과 시름하며 글을 쓰는 문학청년과 중년들이 인생의 꽃을 피우려는 ‘슈필 라움 (spielraum) ’ 같은 곳이다.
글을 쓰려니 막연했다. 낱말들은 한없이 낯설었고 문장들은 뻑뻑했다. 먼저 글을 쓰기 전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대표적 생물학자이자 독서가인 최재천 교수는 “독서량이 많은 사람이 잘 쓰고, 많이 쓴다”라고 했다. 시쳇말로 먹어야 쌀 것 아닌가? 책은 읽지 않는데 글을 잘 쓴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서는 빡세게 해야 하고 일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지난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굳이 ‘본격적’이라고 말한 것은 일주 일독을 목표로 꾸준하게 읽어 보기로 했기때문이다. 업무 시작 전 30분, 점심시간 30분, 지하철 30분, 주말 2시간 , 책 읽기 20개월 지난 지금 약 100권의 책을 읽었다. 물론 책 제목만 기억나거나 아예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많다. 하지만 100권의 책 보다 한 주도 그르지 않고 지금까지 책을 놓지 않은 것에 스스로 대견해했다. 아내와 딸들은 그런 내가 대단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그저 고마운 일이다. 우리 중년들은 존경에 목말라 있지 않은가.
책을 읽기만 한 것은 아니다. SNS(페이스북)를 글쓰기 연습장으로 활용했다. 저자들의 간결한 문장을 흉내도 내어 보았고 좋은 문장은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특히 김훈 작가의 간결한 문체는 내 안에 화인(火印)으로 새겨졌다. 유행을 따르는 책 보다 ‘고전문학’과 ‘수필’을 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고전문학은 수 백 년 전에 살았던 인간의 희로애락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인생의 부피를 넓혀 개선되고 진보(progress)된 나를 형성하게 해 주었다. 수필은 강퍅해진 마른 가슴에 새벽이슬 같은 촉촉함과 젖과 꿀이 흐르게 해 주었다. 책 읽기를 권하는 많은 문장가들이 다독을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여유일 뿐이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책이 고팠기 때문이다.
올해 글을 쓰는 공간 ‘브런치(brunch)’에서 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들이 하나씩 모아지고 있다. 적소성대(積小成大)의 마음으로 두 번째 청춘을 위해 계속 읽고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려 한다.퇴직 전, 나의 글들이 책으로 출판이 된다면 금상첨화다.
퇴직 후에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와일드카드’가 있어야 한다. 글은 나의 콘텐츠고 와일드카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잘 느끼는 것이고, 잘 생각하는 것이며, 잘 말하는 것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대부분 글쓰기다. 카톡, 이메일조차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