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52세, 굳이 만이라고 붙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소심한 저항의 표시다. 오랜 기간 선창에 매여 있던 내 배는 이제 먼바다를 향해 출발할 준비를 해야 한다. 먼바다는 선착장보다 위험할 것이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위험을 무릅쓴 적이 있을까? 한 동안 위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너무 오래 한 곳에 오래 머문 것이 아닐까? 나는 내 삶에서 굳이 위험을 감내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외면했을 것이다. 문득 미국 교육학자 존 A. 셔든의 말이 가을을머금은 바람이 얼굴스치듯 생각났다. " 항구에 머물 때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싯다르타는 "삶이 고통이고 번뇌이며 윤회하는 연속"이라고 했다. 박완서 선생님은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라 했는데, 삶이 그냥 산다가 아니라 살아 내는 것이라면 위험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라고 혼자 중언부언했다
영화 '내가 죽기 전 가장 드고 싶은 말'은 은퇴한 광고회사 대표 '해리엇(80))이라는 여성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까칠하고 완벽주의 성격 탓에 남편과 딸 그리고 주변인들이 모두 곁을 떠나고 홀로 외로운 노년을 보낸다. 그녀는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사망기사를 보고 그녀가 죽고 나면 자신의 사망기사는 어떨지 궁금했다. 그리고 자기의 사망기사를 원하는 방향으로 미리 컨펌하고 싶어서 사망기사 전문기자 '앤'을 찾아 가지만 '앤'은 '해리엇'의 까칠한 성격 탓에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앤'은 '해리엇'의 완벽한 앤딩 기사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고인의 친구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하며 둘째, 가족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고 셋째, 누군가에게 우연히 영향을 끼쳐야 하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구분 되는 자신만의 '와일드카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와 직장동료들에게 칭찬받을만한가? '해리엇'은 직장에서 잘못된 관행과 차별에 저항했다 결국 쫓겨나듯 물러났다. 그녀는 그녀가 옳다고만 생각했다. 직장에서 대부분의 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다.내력이 더 세면 잘 버틸 수 있다. 내력은 내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는 일이 회사에 많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힘이다. 그러면 겸손해지고 초연해질 수 있다,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것을 알게 될 때 세상을 향해 버티는 내력이 생긴다. 그것이 연륜이다. 그리고 경험이다
나는 가족에게 사랑을 받고 있을까? "당연한 거 아니요?"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가족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어쩌면 가족인 줄 모른다. '해리엇'은 남편과 딸을 찾아가서 단절되었던 관계 회복을 위해 고백한다. 시험을 벼락치기로 준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족관계는 벼락치기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족, 부모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후회다. 후회는 마음 심과 어미 모 라는 글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다. 뒤늦게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뉘우친다는 뜻이다. '헤리엇'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해리엇'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위험은 극복하고 무릅써야 한다고 했다. "왜요?"라는 어린아이(브렌다)의 질문에 "나의 잠재력을 감추고 살 수 없었다"라고 했다. 나의 삶을 살기 위해, 나의 잠재력은 무엇이며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혹시 나는 스스로 세상의 경쟁의 줄자 위에서 자기 회의에 빠져 도망치거나 후회하며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잠재력을 감추고 여기 선착장이 더 안전 하다는 착각 때문에 말이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와일드카드는 무엇일까? '와일드카드'의 사전적 의미는 "스포츠에서 정상적으로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출전이 허용되는 선수나 팀"이라고 되어있다. 난 그동안 나의 잠재력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이제 나만의 와일드카드로 가지고 선착장에 묶여 있던 내 배를 풀고, 먼바다로 나가야 한다.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갈 때 그때가 진짜 배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엔딩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해리엇'은 자신의 장례식 후 '앤'에게 자신의 삶을 살라며 늘 꿈만 꾸었던 안달루시아항 비행기 티켓을 남긴다. 그리고 '앤'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어릴 적 꿈꾸었던 곳으로 떠나며 신문사에 편지 한 장을 남긴다.
" 이건 제 사직서가 아니라 , 제 사망기사입니다. 지난 7년간 이곳에서 일했던 젊은 여성은 죽었습니다. 그녀는 주저와 망설임 그리고 두려움을 뒤로하고 떠납니다. 그녀를 슬퍼하거나 애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살았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살았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대사가 마음 안에 화인을 남겼다. 인생이 길다고 하고, 짧다고 한다. 무엇이 진짜 인생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와일드카드를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