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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elraum Aug 22. 2022

나의 카타미(形見), 아버지 낡은 비망록

떠나는 사람들이 남은 자들에게 가슴 깊게 남기는 것은 ‘후회’라는 숙제

 글은, 기존 '아버지의 낡은 비망록' 을 언론사에 제공하기 위해 수정, 보완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라고 양귀자님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 된 것을>에서 말했다. 나의 졸고(拙稿)가 인생의 퇴직, 노후라는 커브를 도는 사람에게 하나의 마중몰이 되길 바라 마지 않는다.


회사 동료와 동창들을 만나서 나누는 얘기는 대부분 ‘노후준비’ 얘기다. “연금은 얼마나 가입했냐” “퇴직금은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자식 뒷바라지는 언제까지?” “퇴직 후 뭘 하며 살아야 할까?” 하며, 서로가 묻고 서로가 답한다.


KBS 아침마당 출연섭외를 받았다. 부모님들의 노후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특강형식으로 진행했으면 한다고 했다. 사전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삶과 노후준비에 대한 가치관이 변했던 이유에 대해서 얘기했다.  


부모님 세대 중에서 이렇게 생각 하시는 분이 많다. “노후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다. 이게 뭐지? 언제 이런 단어가 생긴 거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왔고, 재산이 없는 것도 아닌데 가끔 비어 있는 지갑을 보면 불안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왜 그럴까? 부모님의 젊은 시절 70, 80년대로 돌아가 보자. 이때는 평균 수명이 60세 정도였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 노후생활이 불과 10년 밖에 안됐다. 그리고 무엇을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 세대가 지금 노년을 맞이한 것이다. 수명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자산은 대부분 부동산이다. 이제 두 자릿수 금리는 박물관에나 존재한다. 여기에 하나 더 변수가 생겼다. 부양문화다. 과거에는 부모가 자녀를 부양하면, 그 자녀가 장성하여 나이든 부모를 부양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이든 부모가 여전히 나이든 자식을 부양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노후가 불안한 것이다.


내 고향은 부산 영도다. 아버지께서는 영도조선소(구, 조선공사)에서 일하셨다. 시쳇말로 기름 밥 먹어가며 밤 낮으로 용접 일을 하셨다. 노후준비? 그런 단어가 있는 줄 모르셨다. 그때는 그랬다.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으시려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일을 놓지 않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평상복은 언제나 거친 작업복이었다. 남들처럼 ‘메이커’ 옷 입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셨다. 자식들이 옷을 선물로 드리면 이건 얼마짜리 인지가 제일 궁금해 하셨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신에 대해 인색하고 소비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더 아껴서 자식을 위해 쓰려고 하신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고리오영감>[1]에서 두 딸  ‘아지’와 ‘델핀’ 을 향한 ‘고리오영감’ 마음처럼 말이다.


“내가 어떤 천의 옷을 입건, 내가 어떤 곳에서 잠자건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그 애들이 따뜻하면 나는 춥지 않고, 그 애들이 웃는다면 나는 지루하지 않소”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일찍 산에 오르셨다. 점심 때가 되어도 내려오시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전화에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는 힘없이 쓰러지셨다. 뇌경색 이었다. 이후 합병증과 만성폐쇄성 호흡기 질환으로 긴 투병 끝에 고된 삶의 끈을 놓으셨다.  


아버지의 유품 중 오래된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아버지 삶의 궤적처럼 보였고, 한땀한땀 밀면서 써 내려간 글은 지난한 삶을 회한(悔恨) 하고 계셨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볼 면목이 없구나. 항상 넉넉하게 생활 한번 못하고 먹는 것 마음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구경 한번 제대로 가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냈구나. 우리 가족 모두에게 미안할 뿐이다”


“마누라 머리는 백발이 되고 얼굴에 주름살이 늘었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뿐이다. 못난 나 같은 놈을 만나 돈 한번 넉넉히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보고 싶은 곳 한번 못 가고 이 꼴이 되어 버렸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분하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만은 오래도록 살게. 죽지 말고 살아야 하네. 억울하지도 않은가? 돈이라도 한번 써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당신의 모든 병 가지고 갈게, 당신만은 건강히 잘 있다 자식들에게 호강 받고 오시게. 제발 부탁이네”


낡은 다이어리를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아버지 삶의 무게를 느꼈고 가슴은 먹먹했다.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고 말수가 적으셨던 아버지께서는 인생의 마지막 때 어머니에게 용기 내어 말씀하셨다.


“당신, 미안하고 진심으로 고마웠네”


아버지의 낡은 비망록은 내 삶의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장 쓸개까지 다 빼 주는 것이 부모지만, 부모도 사람이다. 때로는 자식에 치사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


사람들은 죽으면서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 것일까? 그저 눈물만 흘리는 슬픔일까, 아픈 상처일까 아니면 애타는 그리움일까? 아마도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남은 자에게 가슴 깊이 새기고 남기는 것은 ‘후회’라는 숙제이지 않을까/끝.


※카타미:  고령사회 일본에서 은 사람이나 헤어진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물건이란 뜻으로 유품처럼  돌아가신 분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한 물건이나 개인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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