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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elraum May 19. 2022

나는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살았다

이제 낯선 여행자, 이방인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모든 위대한 문학은 두 가지 이야기 중 하나다. 여행을 떠나는 인간, 혹은 어떤 마을에 들어온 이방인의 이야기다” 톨스토이의 말이다. 여행을 떠나는 자가 곧 이방인이다. 그래서 문학은 이방인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태어나고, 학교에 입학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낯섦에서 익숙해져 가는 삶을 반복한다.


지금까지 이방인은 부정적 의미로 여겨졌다. 내부인 보다 외부인, 경계인이다. 가장자리를 배회하는 사람, 아웃사이더다. 요즈음 말로 ‘인싸’가 아닌 ‘아싸’ 인 셈이다. 성경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백성을 이방인이라고 했다. 정착하지 못하고 겉도는 인생이다.


그러나 나는 이방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방인은 자유인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사람이다. 이방인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낯선 곳으로 이동하는 ‘노매드(Nomad)’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이방인은 여행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반백 년 남짓 살았다. 잠시 나의 삶을 반추해봤다. 부자 집 도련님도 아닌 주제에 운 좋게 고귀한 화초처럼 살아왔다. 부끄러웠다. 부모 곁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입혀주시고 먹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뭐 하나 스스로 해 본 기억 없이 주어진 대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살았다. 돌이켜 보면 애매모호하고 흔적 없는 삶이었던 같다. IMF 시절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조직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대로 살았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했다. 주말에도 출근했다.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다.  “윗 분들 말씀 잘 들어!”라고.


과거 회사 조직에서 소위 잘 나가는(파워 있는) 그리고 그렇지 못한 부서가 있었다. 회사에서 어느 조직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부서가 없지만 암묵적인 구별은 존재했다. 영업하는 회사는 영업부서가, IT 회사는 개발부서가 더 많은 대우를 받고 힘이 있는 부서인 것처럼 말이다.


운 좋게 나는 잘 나가는 부서에 근무했다. 신입 시절 타 부서에 업무협조 요청하면 일이 수월하게 잘 풀렸다. 나는 그런 직장생활이 좋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감생심(焉敢生心) 모든 것이 내 능력인 줄 알았다. 누구나 익숙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편안하고 안정감 그리고 위험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절인 배추는 시간이 지나면 점점 숨(息, 숨을 쉬다)이 죽어간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고전영화가 생각났다. 평생 감옥에만 있었던 노인 ‘브룩스’는 특별사면으로 자유인이 되었다. 평생 감옥에서 주어진 ‘가짜 자유’ 때문에 노인(브룩스)에게 주어진 ‘진짜 자유’는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감옥은 원래 자유가 없다. 감옥에 익숙해진 사람은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익숙한 감옥에서 나가길 원하지 않는다. 그곳이 더 자유롭고,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고전영화 <트루먼>이 있다. 주인공 트루먼은 매일 자신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만나는 사람이 똑같고, 인사도 똑같고, 심지어 하는 일도 변함이 없었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일상이고 삶의 반복이었다. 자신만 모르는 무대 위에서 트루먼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자유가 아니라 자신만 모르는 가짜 자유였다. 트루먼은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이방인으로서 현실을 넘어 세상 끝에 있는 천장의 문을 열었다. 그는 진정한 자유를 찾은 셈이다.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면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언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외국을 알려면 내가 머물던 곳을 떠나야 한다. 익숙함을 버리고 온전히 이방인처럼 살아야, 내가 누군진 알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드라마 <미생>의 대사다.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했다. 솔직히 이 말에 거부감이 있다. 회사는 전쟁터도 아니고, 회사 밖이 지옥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회사 밖이 만약 지옥이라면 남은 반백 년을 살아야 하는 내게는 끔찍한 인생이지 않겠는가?  회사는 내게 밥벌이를 해준 고마운 익숙한 공간이고. 회사 밖은 진정한 자유인, 이방인 그리고 노매드(Nomad)로서 살아가는 기회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머지않아 나는 익숙해진 회사를 떠나, 낯선 이방인의 삶을 살아내려 한다. 머리가 백발이 되더라도 머물지 않고 떠나는 자는 언제나 젊은 자일 것이다. 이방인은 트루먼처럼 천장의 문을 열어내고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가면을 벗은 진짜 주인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끝.


[참고] 제목은 <내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에서 나온 문구를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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