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pielraum
Apr 18. 2022
호모루덴스, 잘 놀아야 성공한 인생이다
'논다'와 '쉰다'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다
삶의 궁극적 가치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이렇게 욕한다.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리고 비아냥거릴 때는 “놀고 있네!” 라고 한다.
이런 표현은 ‘노는 것’을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왜 그럴까?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서구 사회와 달리 5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압축성장을 통해 가난과 굶주림의 굴레를 벗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해만 했고, 놀고 쉬는 여가를 즐긴다는 것은 왠지 게으른 삶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노래가락 차차차>라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花爛春盛) 만화방창(萬化方暢)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차차차”
이 노래는 ‘노는 것’ 은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따뜻한 봄날 온갖 생물이 자라나 흐드러지고 꽃이 만발할 때 열심히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잘 놀고 싶다. 머지않은 퇴직 후에도 그런 바램이다. 그런데 어쩐지 자신은 없다. 밥벌이 목이 매이다 보니 제 대로 놀아본 기억이 없다. 기껏 해야 잘 논다는 것이 술집과 노래방 정도이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주변에서 놀면 불안하다는 사람을 목격한다. 과거 잘 나갔던 선배들이 그랬고, 지금도 휴가를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출근이 편하다는 동료들을 보게 된다. <쇼생크탈출> 영화가 생각났다. 평생감옥에만 있던 노인 브룩스, 특별사면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지만 평생 갇혀만 살던 이 노인에게 자유는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 된다. 결국 노인은 목을 맨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어(Johan Huizinger)는 인간의 존재를 ‘호모루덴스(Homo ludens)’라고 정의했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주 40시간 도입으로 여가 시간은 많아졌지만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많아진 시간들이 솔직히 곤혹스럽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교수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고 했다. 그리고 ‘논다’와 ‘쉰다’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라고도 했다. ‘쉰다’는 여전히 일을 통해서만 성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수단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쉰다고 하면 그냥 불안한 것이다. 하지만 ‘논다’는 적극적 의미다. 즐거움과 재미를 찾는 것이다. 재미있어야 일도 삶도 행복할 것 아닌가? 나는 ‘호모루덴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잘 놀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첫째, 재미와 감동의 길은 한계가 없다. 요즈음은 공부까지도 재미로 변용되고 있다. <논어>가 재밋거리고 고전이 감동이 된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찾아가 고생을 즐긴다. 힘든 것도 재미와 감동이 되는 세상이다. 내가 아는 선배는 감동 그 자체다. 그는 몇 달 전 산티아고를 거쳐 터키를 여행 중이다. SNS 에 올라오는 선배의 사진과 여행 일정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몇 년 전 인도도 홀로 여행했다. 그는 진짜 ‘호모루덴스’다.
둘째, 재미있는 놀이는 분명해야 한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이런 질문 하지 마시라. “그래! 어떻게 하면 잘 놀고 재미있는 거요?” 나의 답이다. “그래 무엇을 재미있어 하세요?” 최소한 스스로 뭘 재미있어 하는 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 하지 말라. 여행도 남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여행이어야 한다. 유적이나 특별한 나무와 식물을 찾아 떠나거나, 섬만 찾아 다니는 여행처럼 나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입맛도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 저녁 모임에 소주나 맥주가 아닌 미국의 옥수수버번, 스코틀랜드 싱글몰트위스키 등을 놓고 수다로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자리에서 술은 마시고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다. 재미있고 즐기는 것에 덕후(德厚)가 되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
셋째, 사소한 것이 진짜 재미다. 노는 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재미를 드라마틱한 기쁨을 느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못 노는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쇼생크탈출>명장면 중에 하나다. 주인공 앤디는 교도소장 명령을 무시하고 모짜르트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회색감옥에 들려준다. 아름다운 아리아는 쇼생크 모두에게 자유를 느끼게 했다. 사소한 음악도 누군가에게 재미가 되고 감동이 된다. 재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사소한 재미가 눈에 들어 온다. 재미의 재발견은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인 동시에 老테크가 되기도 하다.
성공한 사람은 노후에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사람이다. “저 분은 어느 회사에 임원이었어” “저 분은 은행장이었어” 가 아니라 “저 분은 고전 음악전문가야” “저 분은 책 전문가야” 식으로 소개되는 것이 휠씬 행복한 삶이다. 불과 몇 년 전 지위로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노후에 만족한 삶을 살아갈 리 만무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