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다운 청년보다 진보(進步)하는 50대이고 싶다. 한 겨울 벗겨진 나목(裸木)처럼 앙상한 알몸으로 견뎌내는 그 원초적 아름다움으로 살아내고 싶다. ‘살아내는 것’은 생명이다. 내면의 힘에 따라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뻗어가는 그런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는 가끔 장기근무 아르바이트생 일까?라고 생각했다.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지만 비루한 밥벌이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다’가 되어 ‘사는 김에’ 나는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일이 ‘사는 김에’ 하는 것이 밥벌이뿐이겠냐 마는 밥벌이에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은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가끔 비굴해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밥벌이는 물론이거니와 알량한 모래알 같은 경험으로 우겨내는 내 모습, 이 세상은 개인의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외치는 소리는 괜히 나의 존재를 고무시키기 위한 비루한 아우성이다.
몇몇 젊은 새로운 직원들이 함께 점심을 같이 먹고 싶다며 연락해왔다. 나도 모르게 “불러줘서 고맙다”라고 했다. 소위 ‘노땅’인데 끼워줘서 고맙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 것이다.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은 곧잘 ‘불러준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이미 한물간 사람인데 초대를 해줬다는 고마움이 불러준다는 말로 나와 버린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내가 슬펐다.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가 살았던 자유는 무엇일까? 조르바는 물질의 결핍에서 자유 했다. 제도와 관념과 사상에서 자유 했다. 특히, 마지막 죽음조차도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유한 모습은 늙고 볼품없는 노인이 아니라 ‘붓다(깨달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조르바의 자유는 ‘카르페디엠’이었고 ‘아모르파티’ 다. 현재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 <책은 도끼다> 저자 박웅현 님은 “구속 없는 자유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없을 때가 진정한 자유”라고 했다. 묘비명처럼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램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족탈불급(足脫不及)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19세기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his own mode)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고 했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는 거다. 난, 나의 방식대로 한 번이라도 살았던 적이 있는가? 생각해봤다. 물론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아내는 뭐라고 할까? “지금껏 당신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았냐”라고 반문하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 것’ 은 무엇이고 지금 ‘나의 방식대로 살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참 멀고도 깊다.
회사에서 월급쟁이 삶의 고삐는 보이지 않는 타인이 쥐고 있다. 어디에서 내가 근무할 지도 타인이 결정하고, 출세 여부도 결국은 타인의 손에 달려 있다. 월급쟁이는 스스로 감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감탄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왔다. 내 방식대로 산다는 것(His or her own mode)’은 과거에 그리 살지 못했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살자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감탄할 줄 아는 삶을 살자는 거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교수는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라고 했다. 여행가서 멋진 풍경과 건물을 보며 “우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힘들여 오른 산에서도 감탄사가 나온다.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마찬가지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움직임 하나 하나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제 나이들 수록 스스로 감탄하는 삶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SNS 등에서 ‘좋아요’에 열광하는 삶이 되었다. 타인의 감탄에 익숙해진 거다. 스스로 감탄할 줄 아는 삶이 행복한 거다. 회사, 집 그리고 친구들과 있을 때, “와! 얘들아 멋지다”“여보, 당신 대단하다!”이렇게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삶이 진짜 행복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삶을 살아내려 한다(His or her own mode).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조르바’를 존중했다. 조르바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조르바’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유함’을 놓지 않았다. 나는 ‘나’를 존중하기로 했다.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이기 때문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