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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elraum Oct 07. 2023

광화문 가는 길

누구에게나 폼나는 기회는 옵니다.

새벽, 맑고 바스락거리는 서늘한 공기가 방안을 삼킵니다. 콧 능선을 지나 아래 동굴 속을 지나더니 곧 정상에 뇌 세포들을 하나씩 깨웁니다.


거실에서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둠을 깨우는 아침소리입니다. 까만 액체는 아직 눈뜨지 못한 세포들을 흔듭니다.


긴 연휴 끝자락, 수변을 따라 걷기로 했습니다.

고개 숙인 풀들은 맑고 투명한 바람에 허리를 폈습니다.


"우리 엄마 허리도 빨리 펴졌으면"


타는 사람, 뛰는 사람, 걷는 사람 많이들 나오셨습니다. 걷다 보니 들깬 잠이 달아납니다. 언제부터 자리 잡았는지 모르지만 내 몸 안에 '지방'이 도망가려 합니다. 어제 마신 알코올도 제집 아닌 듯 달아나려 합니다.

"걷기는 내 몸을 구원하는 십자가요. 부적입니다"


주말 농장이 아니라 도시농험체험장이라고 하네요. 텃밭들이 반듯하게 누워 있습니다. 주인이름도 나란히 세워져 있고, 서걱거리는 땅을 뚫고 쪽파는 얼굴을 내밉니다. 반쯤 허리를 내민 무도 보이고, 배추는 연휴 동안 허리가 더 굵어졌습니다.


여름장미는 가을이 밉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마지막 공연, 공중부양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물러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황화코스모스는 이미  가을하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물러날 때를 알고 때를 다시 기다리면 누구에게나 폼나는 기회는 옵니다.


"언젠가 순서는 온다. 그때 그것을 잡아내는 능력은 삶을 재미있게 살 때 생긴다"라고 김정운교수는 말하더군요.


저는 이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10킬로를 걸었습니다. 잠시 목을 축이고 김훈 <풍경과 상처>를 읽습니다.


"나는 모든 일출과 모든 일몰 앞에서 외로웠고, 뻐마디가 쑤셨다. 나는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비벼서 확인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몽롱한 언어들이 세계를 끌어들여 내 속으로 넣어주기를 바랐다"  김훈도 초로의 나이에는 꽤나 외로웠던 모양입니다, 모든 풍경이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고 했는데  초로의 가을날 상처라는 말은 김훈이나 저나 솔직히 남세스럽습니다


수변을 뒤로하고 자동차도로로 진입합니다. 자동차와 사람의 간격은 헐겁고 한산합니다.


"추석명절 잘 보내세요"라는 하나마나한 정치인 플랫카드만 요란하군요. 정치의 실종과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정치학자가 있지만 정치의 부재가 정치를 살리는 것이 아닐지요. 혼자, 나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중얼거립니다.


청계천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변에 강아지풀이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습니다. 왜? 강아지풀이지? 잠시 쉬어가는 갈 겸 검색엔진을 돌렸습니다.


"개꼬리풀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구미초(狗尾草)라고 한다"라고 나와 있군요. 그렇게 보니 정말 개꼬리처럼 늘어져 있기도 하고 반듯하기도 합니다.

꽃말은 누가 짓는 것일까요?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길은 빨라지고  물비린내는 투명한 바람을 이고 코끝에 닿습니다. 검녹색이끼는 하류와 상류를 구분 짓고 징검다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합니다.


뜬금없는 천안능수버들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머리를 풀고 고개만 숙이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사정없는 사람 없을 것인데 풀지 못한 가슴앓이가 있는지 오늘따라 머리가 무거워 보입니다


허리굽은 엄마와 아들이 앞에 걸어갑니다. 앞질러가야 하는데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날까요?

궁금해서 나도 천천히 따라 걷습니다. 그 옛날 어머님이 청계천에 살던 얘기를 하고 있군요. 아들이 초로의 나이로 보이니 어머님은 팔순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때의 추억을 소환하여 얘기하는 어머님의 기운이 넘칩니다.


추억을 되새기는 것은 그때의 순간을 곱씹는 일일뿐 아니라 행복과 그리움을 새롭게 만끽하게 해 줍니다. 그 짧게 걷는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기와 온기를 얻었을까요.


이제 광화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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