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ielraum May 27. 2024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가 있는 삶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성실하지만 내성적이며 부끄러움이 많고 소극적임" 학창 시절 소년의 행동발달 사항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내용입니다.

‘부끄러움이 많고 소극적임’이라는 꼬리표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한 선생님의 손끝에서 다른 선생님의 손끝으로 마치 '붙여 넣기(ctrl v)'처럼 이어지고 구전되었습니다. 소년은 책을 읽고 발표할 때마다 말을 더듬었고, 그때마다 손바닥은 수천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감전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30여 년이 흘러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그 소년은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았던 유령 같은 친구였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아서 내성적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것일까요? 아님 꼬리표 때문에 그 소년은 소극적인 아이가 되었을까요?  그는 이제 중년이 된 친구와 대중 앞에서 강의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소년은 필자입니다.


 MBTI 검사를 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소극적이고 부끄럼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더군요. ‘ESTJ’, 모험적이며 사업가적 기질이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말이죠’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 아닌 모양입니다.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했던 진짜 내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MBTI가 온전히 저를 정의할 수 없겠지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밀란쿤데라’는 “우리가 보고 읽고 느끼는 모든 존재 앞에 마법의 커튼이 있다”라고 하더군요. 이 커튼은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가리고 숨기며 보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커튼 앞에서 보이는 삶 만을 판단한다고 말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커튼과 장막들로 인해 어쩌면 저는 진짜 내가 아닌 삶을 살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장막 앞에 있는 ‘나’만 보고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장막 앞에 있는 사실만 보아서는 안 되겠지요.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나’를  마주 보도록 해야 합니다.


2006년 여름날 아내는 집에 있던 TV를 없애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말 그대로 상의가 아닌 통보였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둘째는 이제 걸음마를 뛸 무렵이었는데, 퇴근 후 TV가 없어진 집은 조용한 산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떤 철학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론적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글 읽는 습관을 가지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저녁식사 후에 자연스럽게 책을 읽었습니다. 거실을 도서관처럼 바꾸기도 했습니다. 좋은 책이 있으면 책을 구하러 주말마다 서점을 돌아다녔습니다.  두 아이는 사교육 없이 혼자 힘으로 같은 대학교를 논술로 입학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아빠를 닮았다고 하더군요.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아이들을 닮았습니다. 아이들은 저의 좋은 독서 선생님이었습니다. 물론 아내도 마찬가지 입입니다. 솔직히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닌데 너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심장에서 ‘도끼질’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어떤 문장이 나의 감정을 건드려서 내 안에 있는 차가운 바다를 깰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독서는 텍스트(Text)를 눈과 가슴으로 읽는 것입니다. 텍스트만 읽어도 뜻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은 글입니다. 그러나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콘텍스트(Context)를 이해해야 합니다. 콘텍스트는 텍스트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입니다. 문맥 또는 맥락이라고 하지요.


책 읽고 요약하는 연습을 합니다. 이때 단순히 텍스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콘텍스트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유시민 작가의 ‘표현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읽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묻습니다. “어떤 책이야?” “무슨 글이야” 그런 질문을 한 사람에게 자신이 읽은 텍스트를 쉽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콘텍스트를 해석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압축하는 작업이 바로 글을 잘 요약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 어떤 사람(성격)이야?” “무슨 일을 해?”  누군가 이렇게 물을 때, 보이는 사실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해석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재미는 창의성이고 창의성의 원천은 ‘낯설게’ 하기에 있다. 우리가 새롭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다 있던 것들이다. 단지 그것들이 속한 맥락이 바뀌었을 뿐이다”


네에, 그렇습니다. 맥락(Context)이 달라지면 새로워집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삶의 맥락, 콘텍스트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콘텍스트가 바뀌면 내 안에 있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새로운 삶이 된다는 사실을 저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건축물, 박물관, 광장 등을 눈으로 봅니다. 이것은 독서할 때 텍스트를 읽는 것과 같습니다. 좀 더 풍성한 여행을 위해서 텍스트 뒤에 숨어 있는 콘텍스트, 역사적 배경을 알면 훨씬 더 도움이 되겠지요.


릴케는 “모든 사람 안에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숨어있다” 고 했습니다. 삶에서 ‘나’를 가리고 있는 마법의 커튼과 장막을 찢어 버립시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줄 것입니다/끝.

매거진의 이전글 장모님의 사모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