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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주 개인전 - <거의 확실한>

Review

by 사월

2017.7월의 언젠가에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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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주 - <거의 확실한(Almost Certain)> at 시청각


꽤나 오랫동안 들어보았지만 시청각이란 공간을 가본게 이번이 처음이다. 무덥고 습한 목요일 오후 지인들과 함께 각각 아이스 커피와 담배와 아이스 하드에 의존하며 찾아가 들렀다.


<거의 확실한>의 첫 인상은 아직 공사중인 공방의 냄새였다. 띄엄띄엄 놓여진 송판에 실크스크린으로 그러진 판화(일까?)와 벽 입면의 꼭대기에 줄줄이 놓아진 연대기는 순간 '아직 오프닝 전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들게 했다. 이는 시청각이라는 공간을 처음 경험하는 영향도 있다고 생각했다. 방안에 들어서서 조금 더 살펴본 후에야 이것이 거대한 연대기이자 아카이빙의 형태를 띈 단독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시선의 흐름은 벽 꼭대기의 연대기와 송판의 판화를 반복적으로 쫓으며 오간다. 노골적이랄 만큼 강하게 강조된 텍스트와 이미지의 플랫함은, 그 첫맛은 나쁘지 않다.


작가는 이것에 '연대기' 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했으며,연대기의 근간을 이루는 최초의 나열과 작품의 표면에서 드러나는 가시적인 연표들은 그 사이에 여러번의 치환을 담고 있다. 이것은 쉬이 추측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치환의 과정이나 대상들은 모두 같은 규격 안에서 딱딱 맞아떨어지게 변화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개의 드라마에서 수집된 시대상과 인물들이 조립되고, 그 조립된 최초의 가상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이는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가구들, 표상들 같은 시대적 오브젝트들로 한차례 변환된다. 그리고 그 오브젝트들은 서적의 예시그림처럼 단순한 선의 판화로, 기초의 연대기는 그 자체로 달라 붙는다. 두어번의 치환은 그렇게 1대1 대입이 되는 기성품처럼 최초의 발상을 이미지로 쉽게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이 전시, 이 작업을 감상하고자 하는 의욕이 푹 꺾이고 마는 것은, 그렇게 모든 것을 쉬이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부터 온다. 최초의 연대에서부터 이미지까지 모든 것들은 마치 잘 짜여진 IKEA 가구 카탈로그처럼 보여진다. 결국 '연대기' 를 자칭하는 거대한 아카이빙의 형태를 띄는 이 전시는 요즘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수집'에 기반한 작업이다. 그 수집의 대상이 '드라마' 와 '그 안의 오브제' 로 나뉘어있고, 그것을 한데로 엮어내었을 뿐. 아카이빙 작업이 쉽게 내포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아카이빙, 수집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도구이다. 실은 모든 작업 이전에 선행되기 마련인 필수적이자 가장 최초의 수순이기도 하다. 아카이빙 성격의 작업들은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그 수집된 사료들을 다루는데, 하나는 재배열이고, 하나는 치환이다. 사실, 보통 좋은 작업들에서는 대체로 그 모두가 일어난다.


<거의 확실한>의 근간은 11개 드라마에서 추출해낸 인물들과 그 역사를 뒤섞어 만들어낸 가상의 한국 중산층 근대사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을 140여개의 오브젝트로 표상화하여 그려냈다. 하나 흥미로운건, 이 전시 후에 보게되는 '부록' 이다. 별도로 판매하는 <거의 확실한 부록>은 이 각각의 오브젝트들이 무엇인지, 각각의 인물들이 왜 이 오브젝트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드라마의 나레이션 스크립트를 빌려 서술해놓았다. 때문에, 이 부록은 독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볼륨이 본 전시보다 더 방대한 편이다. 전시와 연결지어 본다면, 이 '부록'은 작가가 생각한 원형의 발상에서 실제 전시된 작업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치환 과정에서 발생한 레이어다. 그리고 이 레이어의 존재가 나는 이 전시의 완결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심히 궁금했다. 이 140여 개의 나레이션의 분량을 보면서, 어느 순간 작가가 스스로의 프로세스에 매몰되어버려 습관에 의존한 작업을 해버리게 된 것은 아닌가 추측했다.


몇 번의 치환으로, 거기서 발생하는 균열을 노리는 방법은 너무 흔하고, 때론 안일하며, 지나치게 약싹빠른 전략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홍은주 작가의 아카이빙과 그 치환이 그런 '균열'을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는 지나치게 규격에 들어 맞는, 딱딱 잘라 떨어지는 치환 때문이 크다. 그릇에 담긴 것을 옮겨 담을 때, 항상 모양과 크기가 일정한 그릇에서 그릇으로 옮겨 담는다면, 그 어떤 균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특별한 담론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그릇의 크기과 형태를 정하는데에 큰 고민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많은 고민을 했다. 또한 이 아카이빙은 그 카테고리나 재배열된 변수의 종류와 비교해서 지나치게 길다. 그러니까 불필요할 만큼 많은 것을 아카이빙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는다. 여기서 이미 이 작업의 '수집' 으로서의 완성도는 손상을 입게 된다.


'아카이빙'은 분명 모든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인 도구다. 쉽게 시작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취향적 인간인 예술가들이 자신의 취향을 발휘하고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니까.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그런 '아카이빙' 작업들이 대학생 예술가들이나 대학 졸업 전시회 등에서 빠르게 쏟아졌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유 또한 그 매력에 있다. 다양한 표본의 수가 깊이를 만들어낼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깊이를 보기 전에 표본의 수로 압도해버리자고 약싹빠르게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보곤 한다. 하지만 결국 다층의 레이어로 쌓아올리지 못한 작업들은 결코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언제나 확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거의 확실한> 은 그 원형의 사유는 상당히 재미있으나, 다층의 레이어를 쌓아올리지 못하고 일종의 '덕질' 에서 멈추고 만게 아닌가 하는 우려에 빠지게 한다. 예술 작업과 역사적 사료를 구분짓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더 익혀야 할지를 더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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