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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dy Jan 25. 2020

#002 회색 하늘, 겨울의 아일랜드와 마주하다

이렇게 예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아도 되는데요...

한국에서 4박 5일간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고 효도 비슷한 것도 좀 하다 보니 더블린 행 비행기를 탈 날이 왔다. 2019년에는 출장도 많았던 데다 장거리 비행도 제법 됐는데 더블린 가는 루트도 만만치 않아 벌써 겁이 났다. 그냥 싸다고 산 티켓은 무려 인천 - 뮌헨 - 프랑크푸르트 - 더블린의 여정이다. 뮌헨은 심지어 미국 출장에서 올 때 갈 때 두 번이나 거쳐갔다. 지금은 남자 친구가 된 여행 메이트는 너 이제 그 정도면 뮌헨 공항 맛집 정도는 하나 알아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으니... 오후 4시쯤 도착한 뮌헨은 우중충했다. 아니, 아일랜드도 보나 마나 우중충할 텐데 뮌헨까지 이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유럽의 겨울은 어디나 이렇다. 두 번의 환승으로 너덜너덜해져서 더블린 공항에 내렸는데 심야 12시 즈음의 공항은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 또 우중충했다.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시점이라 짐 찾는데에 이런게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안 귀엽다.


4개월 만에 만난 (구) 여행 메이트, (현) 남자 친구는 다시 한번 경고를 했다. 생각보다 추울 것이고 생각보다 우중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겨울의 아일랜드라고... 더블린 공항에서 한 시간 반 남짓 떨어진 그의 도시로 가는 동안 가랑비가 계속 내렸고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위해 차문을 열자 쿰쿰한 습기 냄새가 확 올라왔다. 인구 밀도가 적어 더블린에도 고층 빌딩이 잘 없다는데 더블린에서 떨어진 지방 도시에 고층 건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사방이 온통 낮은 주택인 동네는 불빛이 다 꺼져 어두컴컴한 게 습하다 못해 으스스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장시간 비행에 너덜너덜해진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어두운 하늘과 더 어두운 바다의 색은 사실 좀 장엄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사실은 Ring of Kerry를 좀 돌 생각이었는데 너무 늦게 일어나 꾸물거리는 바람에 거의 12시가 다 되어 출발하게 되었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Ring of Kerry의 초입에 들어섰을 땐 이미 오후 두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드라이브 웨이에 진입하여 처음 눈 앞에 둔 대서양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어두웠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덕에 바닷물의 색도 검게 보였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 탓에 파도는 얼마나 매섭게 치는지... 정말 딱 내가 생각했던 겨울의 대서양이 눈 앞에 있었다. 늘 바다 여행을 갈 땐 좋은 날씨에 떠나려고 날짜 선정에 신경을 쓰고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를 담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먹구름이 잔뜩 끼어 우중 중하다 못해 우울한 바다를 신기한 듯 한참 쳐다보았다. 


Gap of Dunloe가 아주 조금 보이긴 한다. 뭐라도 보려는 내 뒷모습을 보고 남자친구는 펭귄같다고 했다.


우울한 바다를 뒤로 하고 일단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Killarney를 향해 가는 길 도중에 Gap of Dunloe가 한눈에 보인다는 조망 포인트의 간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유명 관광 스폿에는 꼭 정차한다는 Paddywagon의 버스도 보였다. 아, 여기 유명한 데인 가봐... 남자 친구와 나는 차를 새우고 Gap of Dunloe를 조금이라고 보려고 살금살금 걸어갔는데... 아 뭐가 보이는데 저게 호수인지 강인지 아니면 물인지도 분간이 안된다.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에 웬만해서 날아갈 체중은 아니지만 정말 날아갈까 조심조심 더 가까이 가니 내 눈에 골짜기가 들어왔다. 사실 처음엔 정말 실망스러웠다. 20시간을 넘게 날아와서 로드 트립을 떠난 첫날, 기껏 보인 게 먹구름 낀 바다와 안개에 가려진 골짜기라니... 남자 친구도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내려다보니 불빛 하나 없이 먹구름 사이로 조금 들어오는 햇빛인지 달빛 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 빛이 안개를 뚫고 비춰주는 골짜기가 보였다. 왁자지껄하던 관광객들도 Paddywagon 버스를 타고 모두 사라지고, 아마도 이탈리아에서 왔겠지라고 생각되는 4명의 혈기왕성한 청년들도 떠났다. 빛도 점점 줄어들고 바람은 더 거세지는데 주변은 더 적막해졌다. 아, 나는 이런 게 보고 싶고 이런 게 느끼고 싶어서 여기 왔구나. 어쩌면 내가 지금 눈에 담고 있는 이 풍경이 진짜 아일랜드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즐리는 한국에서 업어와서 맥주 마실 때 마다 같이 찍어줬다... ㅎㅎ


Killarney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내가 돌았던 곳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지만 호텔이 많은 탓일까,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고 연말 분위기까지 더해져 거리는 제법 왁자지껄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처음으로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기네스를 마시며 남자 친구와 날씨는 좋진 않았지만 어스름한 곳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며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West Atlantic Way를 따라 올라가는 로드 트립의 첫날은 그렇게 많은 구름과 안개와 비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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