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대체 그동안 뭘 했어?"
남편은 은수에게 화가 나 있었다. 최근 부동산 광풍이 은수의 아파트 단지를 휩쓸고 지난 후의 일이었다. 전세살이를 하는 남편은 서울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집 한 칸 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도둑맞았다고 은수를 탓했다. 일 년 새 5억이나 올라버린 아파트에 그들은 피난민처럼 떨거진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
"다른 집은 여자가 알아서 척척 잘 사더구먼."
평소 말이 없던 남편이 출근길에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을 은수는 이해했다.
지각 한번 안 하고 다닌 회사였지만, 인사에서 번번이 밀렸고, 승진한 후배들은 이미 같은 동네에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은수는 어쩌면 자신이 남편에게 큰 잘못을 한 건 아닌가, 생각했다. 마켓이 문을 닫을 때쯤 달려가 땡처리 물건들을 담았고 홈쇼핑에서 그 흔한 영양크림 하나 사본 적이 없었다. 민혁이에게 학습지 대신 이비에스 강의를 다운받아 공부시켰고, 교복도 바자회에서 사 입혔는데. 남편이 현관문을 쾅, 닫고 사라질 때 은수는 억울하다는 감정보다 뭔가 비현실적인 감정을 느꼈다.
은수는 찜찜한 마음으로 세수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핸드폰으로 들어온 할인 쿠폰을 확인했다. 영화관은 은수의 집에서 십 분 남짓한 복합 상가에 자리했다. 갈 때마다 관객이 드문드문해서인지 은수는 남편 몰래 첫사랑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에는 남편의 잔소리도, 사춘기로 속을 썩이는 아들도, 올라버린 집값도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은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넓은 상영관에 혼자 앉아 있는 그 시간을 즐겼다. 이런 고요한 공간이 서울 한복판에, 그것도 집가까이 있다는 것은 과한 행운이 아닌가. 그러다가 갑자기 은수는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전세만기일이 떠올랐고, 어쩌면 이 시간을 즐길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거 아닌가, 우울해졌다.
집을 나오며 재작년 플리마켓에서 산 플랫슈즈를 신으려다, 간밤의 일기 예보를 떠올렸다. 비가 온다고 했었지. 은수는 샌들을 신으며 우산을 챙겼다. 아파트 초입을 지나는데 빗방울이 툭, 은수의 왼쪽 볼에 떨어졌다. 그리곤 동시에 삑, 폰이 울렸다. 태풍 경보였다. 속보에는 회오리 감자처럼 생긴 태풍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링링. 은수는 태풍의 이름이 사람들이 떠는 호들갑에 비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파트 초입을 지나온 지 수분도 지나지 않아, 간판이 덜컹댔다. 사람들이 머리를 싸쥐고 종종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거리에는 뒤엉킨 차량들과 깜빡이는 가로등만 남은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 환한 거리였는데 순식간에 어둠이 드리웠다. 은수를 향해 차 한 대가 미끄러지면서 상향등을 쏘았다. 빠른 걸음으로 10분이면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람이 거세졌고 은수의 머리 위로 툭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어머!"
은수는 옆으로 비켜섰지만, 횡단보도 너머에 전신주가 부들거리더니 불꽃을 튀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은수는 대학 동기 한 명이 장마철에 전신주 부근을 지나며 감전사한 기억이 났다. 잠시 갈팡질팡하는 사이 우산대가 휘어졌다. 연이어 도로에서 쿵, 차량 한 대가 가드레일을 받으며 거꾸로 뒤집혔다. 뒤집힌 차량의 바퀴는 물방울을 튀며 윙윙 돌았다. 은수는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치는 바람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계속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뜯어내야만 했다. 차들이 지날 때마다 물보라가 일었다. 이젠 꿀렁대며 도로 위로 물이 차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일순 도로 한가운데로 차량 한 대가 쑤욱, 사라졌다.
싱크홀이었다.
'세상에나.'
은수는 휘어진 우산대를 들고 서서 관객처럼 이 상황을 바라봤다.
그런데 잠시 뒤 그곳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은수는 그것이 수도관이 터진 바람에 토사가 역류하는 것인가 하며, 그것을 눈을 비비며 쳐다봤다. 토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은 대략 진흙을 뒤집어쓴 사람의 형태였던 것이다. 은수는 핸드폰을 꺼내 119를 누르려다 말고 다시금 그 사람 같은 것을 멀뚱히 바라봤는데, 그것은 은수가 몇해 전 영화관에서 봤던 프레데터 vs 에이리언. 그중 자신이 응원했던 프레데터와 몹시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녀석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관절을 꺾으며 유연하게 그곳을 빠져나왔고, 휘어진 팔다리를 댕강거리더니 관절을 우두둑 소리를 내어 맞추는 듯보였으나, 뭐가 잘못된 것인지, 돌아간 머리와 팔다리들이 생각처럼 돌아와 주지 않아 한껏 짜증이 오른 눈치였다.
녀석이 은수의 서너 발짝쯤 앞으로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알아챘다. 녀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앜
은수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콸콸콸.
장떼같이 비가 쏟아졌고 배수구마다 물이 역류하고 있었다. 사거리 신호등은 초록, 주황, 빨간색이 동시에 깜빡이며 비상사태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녀석 뒤로 비슷한 덩치의 동족들이 스멀스멀 기어나고 있었고, 녀석은 다행히도 이곳 행성에서 처음 봤다는 듯 망가진 사거리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곤 뒤에서 쓸려온 토사물과 함께 휘리릭 물속으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gs25 편의점 앞이었다. 플레어스커트가 몸에 미역처럼 감겨 있었다. 편의점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 모두를 꽁꽁 얼려버릴 기세였다. 헌데 아무도 없었다. 이 모두가 어디로 증발해 버렸다 말인가. 편의점 밖 주차된 포르셰 위로 뇌우가 쳤고, 포르셰가 번개를 맞고 파르르 떨다가 뒤집어졌고 불이 붙었다. '어, 저거 1억 5천만 원짜린데.' 은수는 남편의 십만 킬로를 주행한 아반떼가 골골한 바람에 중고차를 알아보다가 우연히 포르셰의 가격을 알게 됐던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은수는 알바를 기다렸지만, 눈을 씻고 봐도 안팎에 인간은 은수밖에 없었다. 우선 정신을 차려보자. 은수는 냉장고를 열고 카페인이 가장 높은 인스턴트커피 한 병을 꺼내 꿀렁꿀렁 쉬지 않고 마셨다. 그때 형광등이 껌뻑였다. 냉장고 유리 너머로 머리통이 180도 돌아간 데다가 머리털 듬성한 녀석이 은수를 바라보며 침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녀석은 눈깔이 하나였다. 그리고 양쪽으로 두 마리가 더 있었다. 그것들은 머리통은 제자리에 있었지만, 내장이 튀어나왔거나 팔과 다리 한쪽이 연체동물처럼 늘어난 모습이었다.
어제 민혁이가 새벽에 라면을 끓여달라는 통에 잠을 못 잤었지. 어쩌면 이건 꿈? 은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번쩍 눈을 떠보았지만 녀석들은 바람 빠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은수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슬쩍 냉장고 도어를 열어 아침이슬 소주병을 양손에 쥐었다. 그리고 녀석의 대갈통에 아침이슬을 갈겼다. 으아아아아 항. 녀석이 울부짖었다. 녀석은 울다가 대갈통에서 흘러내리는 소주를 달싹거리며 혀로 맛을 보는 게 아닌가. 양쪽의 두 녀석은 소주병에 대갈통을 얻어맞고도 맛을 보고 있는 외눈박이를 앞에 두고 우왕좌왕하는 기색이었다. 생긴 것만큼의 투지는 없는 것들이란 확신이 들자, 은수는 용기가 솟았다. 그때 옆의 두 녀석들이 달겨 들었고 은수는 가방에 꽂아놓은 우산 꼭지로 이마에 하나씩 구멍을 냈다. 우산꼭지가 빠질 때마다 뇌수가 흘렀고, 시궁창 냄새가 났다. 두 번째 녀석을 해치워야 하는데 꼭지가 빠지지 않았다. 놈이 사력을 다해 은수의 머리채를 잡았지만 은수는 고등학교시절 운동신경이 남다르다는 체육선생의 말대로 빙그르르 돌면서 머리채를 쥔 녀석의 급소에 주먹을 질렀다.
밀라요보비치 뺨치는 날쌘 동작이었고, 은수는 자신의 동작이 맘에 들었다. 한쪽밖에 없는 눈알과 구멍 난 머리통을 싸쥔 녀석들의 비명을 뒤로하고,
편의점을 빠져나와 은수는 물길로 침수된 도로를 뛰기 시작했다.
뛴다고 했지만 허우적댄다는 표현이 걸맞았다. 자동차들은 라이트를 켠 채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같이 물에 잠겼는지, 아님 구조돼 이송이 됐는지, 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은수는 이 북새통에 아파트를 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때 뇌우가 한번, 두 번, 세 번 거칠게 내리 꽂혔다. 공사장 휘장이 나는 양탄자처럼 어딘가로 휘리릭 날아가고 있었다. 멀티플렉스 앞 가구 대리점에서 흘러내려왔는지 커다란 스티로폼이 은수 앞으로 다가왔다. 은수는 가까스로 폼을 타고 올라 옆 맥도널드 건물 옥상에 올랐다. 이게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니.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테헤란 시내는 평당 만원의 값어치도 없을 만큼 곤죽이 돼 있었다.
그때 크로스백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엄마 엄마 나 피방인데 돈 좀 넣어줘'
'민혁이니? 민혁아 거기 괜찮니? 프레데터가 돌아다녀, 조심해야 돼.'
'아 몰라 몰라 빨리 넣어줘'
그리곤 전화가 끊겼다.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5시라고? 말도 안 돼'
주유소에 정차된 대형 레커차에서 기름이 졸졸 새고 있었다.
'내가 병원 갈 시간이 어딨어?' 갑자기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은 전립선에 문제가 있는지, 언제부턴가 오줌을 졸졸 쌌는데 승진에 영향을 줄까 반차를 내지 못해 병원에 가는 일을 미뤘고, 집값이 오르면서 오줌발이 더 약해지는 악순환에 빠져있었다.
'남편은 아직 회사에 있을까.'
자세히 아래를 내려다 보니 레커차의 바퀴 밑에서 거뭇한 녀석들이 휘적이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투구벌레들처럼 끊임없이 기어 나왔다. 그런데 맨 앞에 선 그 녀석, 소주병으로 갈겼던 외눈박이 녀석이 어디서 주워왔는지, 라이터를 쳐드는 게 아닌가.
오 마이 갓.
일순 레커차가 녀석들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주유소가 빵, 터졌다. 녀석들은 팝콘처럼 터져 오르면서도 동강난 면면에 웃음기가 흘렀다. 그 뒤로도 둑이 터진 듯 녀석들이 계속 어딘가에서 기어 나왔다. 멀리 헬기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어쩌면 환청 같기도 했다. 흙탕물이 건너 도로를 잠식하고 멀티 플렉스의 옥상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얼마 전 태풍에 흘러내린 토사가 다시 은수의 아파트 단지를 덮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집주인이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은수는 다시 스티로폼 위에 올랐다. 건너편 임페리얼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 입구가 보였다. 외벽엔 뭔가 거뭇한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디선가 귀청이 떠나갈 듯 사이렌이 울렸다. 은수는 양쪽 귀를 막고 주위를 둘러봤다. 녀석들은 아파트 외벽 창문마다 몸을 납작 붙이고 있었다. 평당 이억이 넘는다고 뉴스에 나왔던 아파트였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것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면서 한편 남편과 더늦기전에 꼭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링링이 지나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