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과잉시대에 아이를 키운다는 것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거부할 용기
1. 넘쳐나는 교육정보 속에서 길을 잃다.
아이가 한 살씩 먹을수록 나이만큼 정보의 양이 늘어난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는 몰랐던 정보들이, 유치원에 가면서부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체 아이에게 좋다고 하는 것은 왜 이리 많은지.
마치 매니저처럼 아이를 관리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따라 해 볼 엄두가 안 났다.
나는 물리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그만큼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대상을 알 수 없는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건 아닌데...
좋은 정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영유아 셋을 키우는 나와 외동을 키우는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는 서로 다르다. 7살 여아에게 맞는 정보와 5살 둥이 동생들에게 필요한 맞는 정보는 다르다. 그래서 정보의 양이 많아진다고 해서 꼭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보과잉시대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결국 많은 정보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결국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우선순위란...?
그것부터 다시 정해야 했다.
2. 좋아 보이는 것들이 많을 때.
아이에게 좋다고 하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7살은 사교육을 시작하기 좋은 시기이기도 하고, 희망에 찬 부모들이 온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때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나는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애가 셋이고 워킹맘이다. 남편은 육아에 적극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업무시간의 절대양이 나보다 많다. 즉, 내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일하는 엄마 밑에 사는 형제 많은 집 우리 아이들에게는 물론 선택권이 제한되어 있다. 외동이었다면 모든 에너지를 한 아이에게 쏟아부었을 수도 있고, 최소한 라이딩이라도 해줬을 거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런 건 애초에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한 아이를 위해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는 것은, 다른 아이에게 갈 수도 있었을 에너지와 비용의 희생을 포함한다.
3. 보고 듣는 것도 가려가며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해가 되기도 하다.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면 그것을 못해주는 것에 필요이상의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아이를 키우는 행복을 온전히 누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보고 듣는 것을 가려가며 해야 한다. 정보가 이렇게 많고 검색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시대일수록, 그런 정보의 경중을 판단해서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정보를 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우면 옳은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터넷 정보보다는 책을 더 신뢰한다. 인스타 교육인플루언서들의 글을 읽고 따라 하기보다는 책을 사서 읽는 것을 선호한다. 책을 사서 읽을 때도 인터넷 광고보다는 내가 직접 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골라보고 사서 읽는다.
이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는 게, 인터넷에서 있는 온갖 정보들을 읽다 보면 마음이 다급해지는데, 책으로 된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게 바라보게 되고 인내심이 생긴다.
나는 하루이틀만 엄마를 할게 아니기 때문에 당장 오늘내일만 생각하며 살 수 없다. 지금 당장 해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글들만 보며 육아를 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해로운 음식을 안 먹이려는 엄마의 마음처럼, 스스로에게도 해로운 정보는 가려가며 보게 한다. 마음이 급해지는 글이나 정보들은 애써 피한다. 이것은 내가 못해주기 때문에 피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이나 나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좋은 선택은 지금 당장의 최선의 선택이라기보다는 멀리 봤을 때 최악을 피하는 선택이어야 한다. 삶을 길고 멀리 보려면 당장의 내 눈앞에 빙빙 도는 날파리들에게는 눈길을 주면 안 된다.
4. 취사선택을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
세상에 좋다고 하는 것들이 많을수록, 정보가 과잉될수록, 자기만의 줏대, 자기만의 철학이 중요하다. 내가 모든 선택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흔들리면서도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했다.
먼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것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희생이 너무 크진 않은지를 먼저 고려했다.
첫째는 5살에 유치원에 갔지만, 쌍둥이 동생들은 5살에도 어린이집을 보낸 것은 물론 아이들의 차이도 있지만, 일하는 엄마인 내 상황에 대한 생각이 우선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어린이집보다 유치원이 좋다고 하더라도, 내가 일을 하는 상황에서는 보육이 우선인 어린이집을 보내는 게 위급시에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떤 것이 아이에게 좋을까?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우리 가족에게 좋을까? 어떤 선택이 우리 가족이 위급시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까? 를 먼저 생각했다.
이건 우리 집처럼 애는 많은데 엄마 아빠는 모두 일하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생각해둬야 할 문제다.
한 명의 아이에게 좋은 선택이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라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어느 누군가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가정은 옳지 않다, 그 희생에는 엄마인 나의 희생도 포함이 된다.
예를 들어, 첫째가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학기 중에는 내가 라이딩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바로 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에 아이가 원하는 대로 바로 다니게 하려면 엄마인 나는 집에 돌아와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고, 동생들은 어린이집에 더 오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첫째에게 지금 당장은 안된다고 얘기했다.
대신 내가 방학을 하고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아이가 원하는 학원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아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당장 할 수는 없고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림 후에 다니게 된 학원은 훨씬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 기다림이 우리 가족에게는 당연하다. 원하는 것을 당장 가질 수는 없다. 그런 기다림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아이 하나를 키우며 아이에게 엄마아빠의 모든 에너지를 오롯이 담는 가정을 보고 있으면 저게 맞는 거란 생각도 든다. 맞벌이 가정에서 어른 둘이 온전히 돌볼 수 있는 자녀의 수는 하나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기에 그 기준을 우리에게 맞출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가족의 길을 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가족만의 철학이 필요하다.
엄마라는 사람은, 그 가족만의 철학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요즘은 내가 때론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이런 묘기와 같은 일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