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강철저 May 26. 2024

우리는 이제 싸우지 않는다.

소리는 지르지만 싸우지는 않아요.

우리는 이제 싸우지 않는다.


서로에게 가끔 소리를 지를 뿐.

지르고 끝이다. 담아두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에게 화가 오랫동안 난다거나 응어리가 생길 만큼 분노가 쌓이는 때가 (거의) 없다.


물론 자잘하게 짜증이 나거나 속이 깝깝하거나 그럴 때도 있지만, 남편내가 그런 날이 있겠지 싶어서 막 화가 솟구치진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어린아이 셋을 키우는 일상은 매일매일이 자잘한 문제들의 연속이다. 우리는 손발을 오래 맞춘 2인조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후 상대에게 바통을 넘며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손이 어긋나거나 바통을 떨어뜨리거나 할 때마다 서로에게 윽박지르고, 윽박지르고 나서는 또다시 일상을 반복한다.  


화가 나더라도 서로를 위해 한번은 봐준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면 버럭 내지르기도 하지만 뒤끝은 없다.


내 그럴 줄 알았다며 서로의 실수에 무안을 주지 않는다. 내가 이번에 이렇게 화를 냈으니 다음번엔 상대방이 변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화가 나면 화를 내기도 하고,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도 하고, 그럼 네가 먼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아니, 이게 싸움이 아니면 뭐냐고?


싸움이라고 하면 싸움이긴 한데, 내가 남편과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런 언쟁들이 더 이상 서로의 마음에 앙금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불만이 있으면 불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다. 대화 주제를 피하거나, 싸웠다고 해서 며칠씩 말을 안 하거나 하진 않는다. 


불만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고, 싸우면 그날 안에 풀고 잔다. 억울한 점,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고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지만 부탁했다고 바로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 또 윽박지르고 또 부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남편이 내가 부탁한 일을 잊어먹었다면


아, 쫌! 기억 좀 제대로 하라고!


라고 소리를 빽 지르긴 하지만 진심으로 분노가 일거나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꼼꼼하진 않으니까.


내가 좀 더 하려고 한다. 남편도 다음에는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노력한다고 실수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노력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화는 풀린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침 먹은 것도 치우지 않고 설거지도 안 한 상태로 애를 보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고 해서, 퇴근하고 온 남편이 내게 집안일은 대체 왜 안 하냐고 화내지 않는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설거지부터 하면서 말한다.


 "아침 먹은 거는 설거지 꼭 해줘, 벌레 생겨."


그러면 나는 그다음 날은 아침 설거지는 꼭 해두려고 한다. 그러고 며칠 뒤에 또 설거지를 못하고 낮동안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또 일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미워하는데 쓸 에너지가 남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서운함을 쌓아다가 터뜨리게 되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드는지 알기 때문에 쌓지 않고 말하려고 한다.


먼지가 쌓여서 뭉치가 되기 전에 쓱 닦아버리듯, 마음속에 앙금이 생기기 전에 말해버린다.


나 지금 당신이 이러이러해서 힘들어, 서운해, 화가 나. 저러저러하게 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상대는 대답한다.


응 알았어.


이렇게 말하고는 싸울 시간에 잠이나 잔다. 

서로를 측은히 여긴다. 측은한 상대에게는 화가 나지 않는다. 내가 힘든 만큼 똑같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상대에게 측은함을 느끼게 되면서부터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무수한 소모전을 겪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역할이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 이제는 아침에 아이들이 깼다고 해서 엄마 아빠를 찾기보다 자기들끼리 논다.


우리 부부는 갑자기 관객이 되었다. 눈뜨면 육아 출근이던 시기를 건너와 아침에 아이들끼리 노는 모습을 보며 커피 한잔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한 거다. 올레!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예전에는 많이 싸웠던 것일까?


모르겠다. 남들은 얼마나 싸우는지 모르니, 우리가 예전에 '많이'싸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근데 그런 싸움의 기억들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장면들의 대부분의 배경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예전에는 별거 아닌 일에도  나고 억울했다. 남편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나만 힘들다는 생각에 억울했다.


육아에 99를 내가 하고 남편은 1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화가 났다. 실제로 남편도 허둥지둥 대며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금은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건 내 개인의 내적 성장일 수도 있고, 남편이 변한 것일 수 도 있고, 애들이 그때보다 더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계속 불만을 갖고

변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자 에너지 낭비임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남편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편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 내가 잘 못하는 일을 더 잘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도록.


부모에게서 태어나 짧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면 남은 인생은 배우자와 함께 산다.


나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님이나 자식들보다 남편과 보내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은 어린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없지만,

결국 내 곁에 남아 여생을 함께할 사람은 남편이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한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나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납득시키려고 노력하고 일부는 포기하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서로에게 기대하고 때론 감사하고 때론 화도 내며 매일의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육아는 강도가 높은 노동인지라 우리는 손발이 잘 맞더라도 힘이 부치고 체력이 달릴 때도 있다. 그럴 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가깝다고 화를 내지 않게 노력하고 싶다. 가장 가까이에 있기에 나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과 감정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상대에게 한번 더 측은한 마음을 지니고 싶다.


앞으로도 만약에 싸울 일이 있다면 그때그때 잘 싸우고 싶다. 적당한 타이밍의 싸움으로 해묵은 감정들은 해소하고 다시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며 애정으로 우리 둘 사이의 간극을 채우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기록한다는 것은 매일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