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동글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기억 속에 저장된다. 어떤 기억은 금방 사라지지만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기억들이 있을까. 어린 시절 성장기를 보냈던 4층짜리 아파트와 그 옆의 놀이터, 중학교 시절 외삼촌들과 축구를 즐기던 외갓집 바로 뒤의 국민학교, 대학교 시절 힘겨웠던 고백에 행복한 마침표를 찍었던 그 호프집, 생각해보건데 기억에 남는 대부분의 일들을 떠올릴 때 그 일이 일어났던 장소를 함께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별 뒤에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장소' 때문이다. 함께 데이트했던 동네, 처음으로 고백한 그 거리, 다투고 화를 삭이며 어떻게 사과하지 고민했던 그 골목,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보러 갔던 그 극장, 이별 후 시간이 흘렀을 때 그 장소, 그 거리를 우연히라도 가게 된다면 그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 난다. 그때 또 한 번 가슴이 아려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ovP-VNnuP0k
왜 하필,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을까. X요일의 저녁이었다. 약속을 잡고 기다리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 날이 시작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잘 가지 않는 생소한 곳에서 만나자고 할 걸 그랬다. 그 때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구석 구석에는 너와 나의 흔적이 가득 남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 다녀야 하는 그 곳을 지날 때마다 그 때의 모습이 환영처럼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듯 하다.
나는 아직도 그 곳을 지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그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랑도 다툼도 힘겨운 적응도 모두 그 곳에서 이뤄졌다. 그 거리는 길고, 많은 버스들이 그 곳을 지난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그 경로를 피해 다닌다.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던 그 동네 역시 왠만하면 가지 않으려고 한다. 왠지 모를 서글픔과 아련함이 나를 감싸기 때문이다. '에이, 왜 떠오르고 그래'하며 고개를 저어도 어쩔 수가 없다.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거리를 피하고 싶다. 참 잊기 힘들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인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이유다. 그 거리를 걸을 때면 왠지 니가 있을 것 같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비슷한 모습의 사람을 발견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당연히 그 때와 지금은 다른 모습일텐데, 내 머릿 속에 남아 있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가 계속 다른 사람 위에 내려 앉는다.
많은 이별을 해왔다. 추억의 장소를 대하는 내 마음도 점점 달라질 것이 자명하다. 잊혀져감에 따라 그 장소에 남아 있는 추억은 단순한 기억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대학로 낙산공원, 인천 주안, 강변역 등의 장소는 이제 그땐 그랬지 하며 웃으며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이 어서 오길 바랄 분이다.
언제쯤 그 '거리에서' 미소를 띄며 너를 추억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그 거리는 아련함, 그리움, 애타는 마음으로 나를 맞이한다. 이 또한 이별의 과정일테니, 언젠가는 지나갈테다. 그리움, 아련함 또한 감정에 대한 자극일테니, 자주 느끼고 익숙해지면 무덤덤해질려나. 지금은 최대한 그 거리를 가지 않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결국은 시간이 중요하다. 그 거리의 의미가 퇴색할 시간 말이다. 한 번의 사랑이 끝나면 많은 것들과 이별해야 하는데, 심지어 거리, 장소와도 이별을 해야하나 보다. 떠나 보내야 할 것이 많다. 생각해보면, 사랑을 할 때 많은 연인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둘 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즉, 사랑이 끝났을 때는 부여했던 의미들을 거둬 들여야 한다는 말인데, 워낙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이것이 꽤 쉽지 않은 작업이 되는 것이다. 의미 부여는 서로 하기도 하고, 혼자서 하기도 하니, 이별 후 해야 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추억이 어린 물건이나 온라인, 모바일 기기의 흔적들은 치워 버리면 되는 법인데, 이놈의 거리라는 장소는 내 힘으로 어찌할 방법이 없다. 부동산 재벌이 되어야 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