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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은 Dec 13. 2018

2. 그저 따뜻하게 한참 바라보기만 하자는 것일 수도

02.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정에 대하여.


오롯이 혼자이고 싶던 나는 사람들과 같이 길을 걷는 중에도 특유의 싸늘함과 이기적인 성격으로 타인과의 거리를 확보했다. 어디서나 눈덩이처럼 뭉치길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하나둘씩 모여 총 7명이라는 ‘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전투적으로 나만의 시간을 확보했다. 선을 긋고, 눈을 맞추지 않으며 오로지 책과 일기장만 들춰보았다. 말을 적게 하고 대답을 짧게 하거나, 옅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면 웬만한 사람은 두 마디 이상 붙이지 않는다. 설령 뒤에서 욕을 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다소 실패한 부분(많은 한국인들과 무리 지어 다닌 것)이 있었지만 꽤 괜찮은 여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 내내 혼자!!! 를 외치던 나는 특별히 내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로 한국에 돌아왔고, 돌아와서 그 사람(현재의 남편)과 몇 번 만나 밥을 먹고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 마음 어딘가 쯤에 설레는 마음과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감정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천천히 생긴 마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당시) 내 마음이 그 사람과 특별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기보다 그저 따뜻하게 한 참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한 마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성의 욕망은 '섹스를 하자'는 말로 무조건 해석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 욕망은 접촉보다 더 따뜻하게 한참 바라보기만 하자는 것일 수도 있고,

손끝으로만 닿아보자는 것일 수도 있다. (중략)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의 성욕이 반드시 삽입을 당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이박혜경. 1999. 섹시함의 페미니즘적 전유는 가능한가?


절뚝거리던 나를 따뜻한 눈 빛으로, 걱정 어리게 바라봐 주던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그 순간의 바람과 햇빛. 찡그리던 미간의 주름도 꽤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비바람에 힘들었던 날 내 가방을 들어주던 듬직한 손도 기억나고,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는데 그 와중에 길을 잃은 나를 찾던 눈빛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누구나 다 있을 법한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 그게 사랑이라고 퉁 쳐지는 감정이 되겠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적으로 또 동일하게 일어나는 무언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각자의 순간들이, 서사가 다양할 텐데 드라마와 영화는 보통 이 감정들을 꽤나 획일적인 법칙으로 그려낸다. 마치 수학공식처럼 남자와 여자가 운명의 장난처럼 만나서 티격태격 싸우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두근거리게 된다. 서로에게 두근거리는 마음이 불편해지면 더욱 격하게 말을 하며 오해가 쌓이고, 상대방의 누군가를 아기처럼 질투한다. 혼자 방에서 벽을 치거나 이불을 걷어 차는 장면이 나오고, 나중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소소한 트러블과 커지는 오해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극적인 계기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격정의 키스를 한다. 이렇게 글로 보면 웃기지만 영화든 드라마든 ‘사랑’ 혹은 ‘로맨스’를 다룬다면 꼭 판에 짠 듯이 이런 공식을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공식”에 짜 맞춘 사랑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배웠다. 드라마, 영화, 만화라는 이름의 문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연한 사랑의 방식과 공식을 가르쳤다. 따라서 몰리 해스켈(1973/2008)은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낸 ‘거짓말’과 ‘포장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 쓰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다. 내가 몇 번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자 이내 찹찹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 강아지가 내 무릎 위로 올라온다. 갑자기 나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내 눈물과 콧물을 자신의 혀로 정성스레 핥아 준다. 온몸에서 나를 걱정하는 에너지가 충만한 채로 나를 위로한다. 내가 우리 집 강아지를 쳐다볼 때의 눈빛과 나를 쳐다보는 우리 집 강아지의 눈빛은 분명 동의어다. 꼭 울지 않더라도 무언가에 골몰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는 강아지의 눈 빛에 나는 말 없는 위로를 받는다. 내가 티브이를 보거나 책을 보다가 오늘처럼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 미묘한 숨소리를 알아채고 어디선가 나타나 내 무릎에 올라온다. 조용한 눈물에는 자신의 온기만 전하고, 굵은 눈물에는 손 같은 발로 나를 위로해주거나 혀로 내 눈물을 닦아 준다. 우리 집 강아지의 이런 마음과 행동은 사랑이고, 출근 전에 나에게 키스를 해주는 저 남자는 내가 속은 '포장지'일까?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서 오롯이 혼자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을까? 아니면 그렇게 자라왔을까?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사람의 감정과 그 감정에 기반한 애정, 욕망, 친밀함은 어디까지가 사적인 영역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어디서부터 정책의 범위에 준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들은 도대체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거기서 생각이 멈췄다면 나는 이 논문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장지에 불과한 허울 좋은 로맨스를 만들어낸 영화와 매스미디어 그리고 그들이 계속 그려내는 남성의 욕망을 비판하면 되겠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술 마시면서 요즘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까대면 그만이다. 근데 내가 이박혜경박사님의 논문에 계속 발부리가 채이듯이 침잠하는 이유는 내가 '그 감정'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그저 따뜻하게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주는 것의 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이 것이 만년 포장지에 불과한 허상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저 따듯하게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친밀함’이라는 감정에 이렇게 발부리가 채이듯 채이는 것 같다.


ㅣ참고문헌

이박혜경. (1999). 섹시함의 페미니즘적 전유는 가능한가?. 여성과 사회(10) 109-119.

몰리 해스켈. (2008). 숭배에서 강간까지. (이형식 옮김). 나남출판 (원서출판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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