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다.
분명 이 주제에 대해서 논문으로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브런치라는 새로운 공간을 찾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논문의 형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연구노트를 사서 첫 장에 "친밀함의 영역과 정책의 상한"이라고 적어둔 뒤, 친밀함의 영역과 애정의 영역을 어떻게 조작화 할 것이며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 글의 순서는 어떤 방식으로 풀어갈 것인지를 계속 고민했다. 어떤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매 글마다 어떤 형식으로 글을 써 나가야 할까 이런 고민들이 계속되니 답답한 마음은 계속 답답해져 갔다. 마음이 답답하니 나도 모르게 선행연구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분명 이런 방식으로는 풀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습관처럼 논문의 형식만 떠올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문득, 오늘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한 달 내내 우리를 괴롭히던 폭염이 사라져 있었다. 정말 거짓말 같은 가을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보니 마치 그동안 날 괴롭히던 고민들 또한 폭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것 같은 더위가 지나간 것처럼 '잘 쓰고 싶은 욕심들'과 '그 욕심이 데려오는 고민들'을 이 바람이 가는 길에 같이 흘려보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막상 돌이켜보면 엄청 많은 연구를 한 것도 아니고 '석사논문' 하나밖에 안 써봤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습관이 생긴 걸까 싶어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이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자니 무더위도 고민도 전부 거짓말 같아서 계속 웃음만 난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선선함. 이 거짓말 같은 바람을 느끼고 서 있다 보니 문득 이 글을 '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인간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고민들을 에피소드 별로 나눌 생각을 하지 말고,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싶었던 것 같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가... 왜 이런.. '친밀함' 그리고 '애정' 그리고 '돌봄 노동', '가족' 그리고 '정책의 범위와 영역, 정책의 상한'이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꽂히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보통 (질적) 연구의 서두에 '연구자'의 위치와 입장을 먼저 밝히는 것이 순서다 보니 얼떨결에 꽤 논문의 형식을 빌리는 것이기도 한 셈이다. 이 글을 시작으로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 고민들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순간순간의 경험을 글로 풀어가 보려고 한다. 나는 나대로 내 머리를 괴롭히는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서 내 머릿속이 후련해졌으면 좋겠고, 어딘가 계실 독자 분들에게는 삶과 전공을 가로지르는 나의 고민들이 참 별나다 싶어 우습고 재밌었으면 좋겠다.
Camino de Santiago: 오롯이 혼자 감당해보고 싶은 마음.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빛 아래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내가 오롯이 나로만 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곳의 날씨도 늘 따듯했다. 이 더위가 조금 힘들만하면 바람이 불었고 청명한 하늘이 꼭 오늘 하늘 같았다. 그런 곳에서 나는 길을 걷다가 사진을 찍거나 길에 앉아 책을 보거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쓰거나 했다. 일을 그만두고 떠난 여행이라서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내가 진짜 대학원을 가고 싶은 건지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곳에서 여려 나라에서 출발한 여행자들을 만났고 간단한 인사와 격려를 나눴다. 당연히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도 있었고 그들은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내 나이와 이름, 이 곳에 오기 전에 하던 일, 한국에 돌아간 뒤의 계획 등등을 물었다. 한국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안부에 불과 하단 걸 알지만 오롯이 혼자서 이 길을 걸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피해 다녔다. 말수가 적고 걸음이 느린 나를 그들은 걱정된다며 챙겨주려 했고 나는 그들을 앞으로 보내고 계속 뒤에 있기를 자처하면서 오롯이 혼자 있기를 원했다. 태생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웃사이더'인 나를 누가 챙겨주려는 것도 상당히 불편하거니와 이 곳에서 나는 그 어떤 위험과 공포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보고 싶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툭하면 올라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아무래도 한적한 길을 새벽에도 밤에도 걷게 되다 보니 언제 만날지 모르는 강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같은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낯선 남자를 만나 강간을 당하고 버려져 죽임을 당하거나 내 시체가 전시되거나 내 몸이 '증거물'이 되어 이 낯선 나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나는 이런 공포가 꽤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곳이 소매치기와 강도가 많은 나라여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나에게 각인된 무언가라는 이야기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늦으면 이 공포와 두려움은 몇 배가 되었다. 그런 일은 늦은 밤 유흥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새벽기도를 가던 길에 강간 및 살해를 당하는 것도 꽤 있는 일이었고, 여성은 살해 전에 꼭 강간을 당했으며 증거를 없앤다는 이유로 인적이 드문 곳에 매장되거나 방치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눈 앞에 '증거물'이 있어도 미제사건이 되는 일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해가 중천에 있어도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는 절대 지나다니지 않았다. 모든 길은 다 연결되어있다고 하지만, 엄연히 내가 지나갈 수 있는 골목과 지나갈 수 없는 골목이 있었다. 한국과 서울이 치안이 좋다고들 하지만 남성과 남성 외국인 관광객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런 나라에서 살다 보니 부모님은 늘 나를 단속시켰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나는 오후 6시 이전에 집에 들어와야 했고 졸업 이후에는 오후 10시 전까지 꼭 집에 들어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의 저녁식사에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나는 짜증이 났다.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께 들을 꾸중과 잔소리들이 자동적으로 연상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내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신문을 들이대면서 어제도! 오늘도! 어떤 동네에서 여성이 길을 가다가 '이유 없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려주었다. 그러다 말미에는 "너도 그렇게 되고 싶냐"라고 물었다. 그렇게 26년을 살았고, 지금도 한국에서 여성은 이유 없이 죽는다. 길을 가다가 죽고, 화장실에 갔다가 죽는다. 그래서 이렇게 통제되는 삶을 사는 것이 불편하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과 공포심을 계속 상기하면서 경계하면서 사는 삶이 너무 힘들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물론 내 주변 사람들은 전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나도 부모님의 말과 행동을 전부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싸워도 봤지만 변하지 않아서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고, 그런 과정들 속에서 나 역시 부모님이 제시하는 통계를 신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여성 사망률이라는 어떤 '확률'이라는 개념이 나의 생명 앞에서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신이 오늘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78%의 확률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누가 외출을 하겠는가? 그러나 급한 용무가 있어 짧게 외출했다가 무사히 살아서 집에 돌아온다면 22%의 확률로 살아남았다고 하겠는가? 아니다. 그런 확률게임은 수학 문제집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고,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무조건 살고 죽는다는 두 가지 경우의 수에 불과하다. 굳이 확률로 표현하자면 50%에서 시작해야 할 숫자놀음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속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통계에 포함되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연고가 있는 여성의 죽음만을 기록하는 것이라 그렇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의 생사를 궁금해하는 산자가 죽은 자의 죽음을 알려야만이 그 죽음이 숫자로 기록된다. 따라서 나는 '나'로 살다가 누군가에 의해 강간을 당하면 '증거물'이 되었다가 내 생존을 기억하는 이의 신고를 통해 '숫자'가 되는 죽음의 의식을 치르게 된다. 여전히 나는 이 죽음의 의식 속에서 '증거물'이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힘들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늘 경계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앞에는 재건축을 기다리는 주택 부지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조권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그 어떤 건축회사도 사려고 하지 않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서울 집값에 한방을 노리며 아무도 팔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기존의 주인들과 새로운 주인들의 길고 긴 실랑이 속에서 점점 범죄의 소굴 같은 모양새로 변해갔다. 그곳을 지나게 되는 골목길은 나에게 오랜 시간 동안 '지나갈 수 없는 골목'이었고, 어떤 이유에서도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으며 22%의 확률이 무의미해지는 골목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그 골목에 이상한 큰 차들이 지나다녔다. "22%의 확률과 50%의 확률 사이에서 누군가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목이 메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였을 수도 있으므로, 어제 내가 야식을 참지 않았다면 그곳에 누워있을 여자이자 증거물은 곧 나였을 것이기에 깊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더 크게 더 멀리 돌아서 다녔다.
그런 삶을 살았다. 여느 딸들이 그랬고 딸 가진 부모들이 그랬듯 나 역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너무 괴로운 날에는 전력질주를 해서 새벽기도를 다녀오기도 했고, 죽음에 대한 생생한 공포들에 두려울 때면 칼을 쥐고 잠에 들기도 했다. 베개 옆에 칼을 두고 골프채를 두고 자면 그게 나를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은근하고도 실질적인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내 몸에 각인된 공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았고, 부모님은 날 갑자기 잃고 싶지 않은 두려움 속에 나를 그렇게 키웠다. 그렇게 살아온 내 삶에서 혼자 오롯이 견뎌보겠다며 나선 길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보호받지 않고, 돌봄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타인을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보고 싶었다.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죽는 건 매 한 가지인데 이왕이면 해 보고 죽자는 마음도 불쑥 올라왔던 것 같다. 그렇지만 비행기 표를 끊었을 때부터 계속 악몽에 시달렸고, 똑같은 악몽에 시달리는 엄마와 아빠와 한 집에 살았으며 덤덤하던 동생마저 걱정하기 시작했을 때는 뭐랄까... "차라리 암에 걸려서 이 공포가 눈에라도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떠난 여행이었다. 오롯이 혼자 있고 싶은 여행. 오로지 나 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행이고 싶었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서 이 길을 완주하고 나면 소소하지만은 않은 성취일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더 적극적으로 혼자 있고 싶었다. 계속 끝까지 더욱더 적극적으로 오롯이 혼자, 혼자이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들을 만났다. 어차피 보낼 사람이라 이름도 묻지 않았다. 호구조사하는 듯 한 질문들을 내가 너무 싫어하다 보니, 사실 나는 타인에게 질문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그때가 산티아고 길 중반 쯔음이라 적당히 에둘러 말하는 스킬도 조금은 늘었던 쯔음이다. "저는 체력이 좋지 않아서 걸음이 느리니 기다리지 마시고요... 만나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같은 적당한 말 들을 적절한 타이밍에 말하는 센스가 생겼던 것 같다. 그런 말들 속에서 그 들 역시 나에게 어떤 신상에 대한 말을 하지도 않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같이 걷는 날도 있었다. 길 위에서 그들은 이 길을 너무 신성시하지도 않았고 친목이라는 명목으로 불필요한 말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뭐.. 불편하지는 않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늘 하루치만큼의 내 몫을 묵묵히 걷다가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익숙한 그들이 있었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일기를 쓰고 나면 그들은 나에게 저녁을 같이 먹겠냐고 물었다. 오는 길에 사 온 스파게티면이 너무 많아서, 저 길가의 레스토랑의 메뉴를 이것저것 먹어보고 싶어서 라는 이유를 대면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딱히 거절할 것이 없는 이유라 고맙게 호의를 받았고 차액이나 물 등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넘치지도 과하지도 않는 배려를 받고 적절한 감사를 전했던 시간들이었다. 뻔한 결말이지만 그 두 남자 중 하나가 지금의 내 남편이고 다른 하나는 남편과 나의 친구다. 분명 나는 오롯이 혼자이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고 뼛속까지 심긴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는데, 굉장히 따듯한 감정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들과 기억들이 이제는 희미해졌지만 마치 기억나는 것처럼 살고 있다. 마치 각인된 무언가, 체현된 무언가, 몸과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무언가 처럼 말이다.
덧. 너무 추운데 선선한 바람과 폭염 이야기가 나와서 놀라셨죠? 18년 9월 1일에 처음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