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친밀함'이라는 감정은 굉장히 광범위한 대상을 향하면서도 몇몇의 대상에게만 느껴지는 감정이다. 비슷한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는 '애정'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친근감'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조금 야트막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애정이라는 말은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친밀함'이란 말은 뭔가 익숙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또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이지는 않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이 감정, '친밀함'이라는 감정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돌봄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슬슬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에 이르러 어디에든 내 생각들을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나는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로 일했다. 분명 모든 아이들을 공평한 사랑으로 대해야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몇몇에게 특별히 친밀함을 느꼈다. 돌봄 노동자이면서 교육자였던 나는 '편애'를 한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친밀함이라는 감정은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소중한 감정이지만, 교사의 사랑과 애정을 받는 대상은 나의 친밀함으로 인해 묘한 특권층이 되는 터라 직업적인 측면에서는 자제해야 할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자제한다고 숨겨지겠는가? 노력은 했지만 표정으로 말투로 티가 많이 났고, 때문에 동료 교사와 원장님이 계속 자제하라는 슈퍼비전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의 친밀함은 돌봄을 위탁한 학부모들의 눈에는 좋기만 한 감정이었다. 그들은 나의 친밀함에 대해 '정말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것 같다며 칭찬의 피드백을 주었다. 직업적으로는 자제해야 할 감정이지만 돌봄을 위탁한 사람들은 상당히 좋게 느끼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보육교사로 일하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었다. 어린 친구들에게 나는 세상을 다 아는 절대자처럼 보였을 테고 나의 지식의 얕음과 편견 섞인 태도에 대해 그들은 알 턱이 없었다. 세상 그 누구도 그렇게 봐주지 않지만 직장에 가면 나를 대단하게 봐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 속에서 나는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나의 행복 사이사이 틈 속으로 이따금씩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나름대로 꽤 행복한 직장이었는데 말이다. 어린 친구들과 나의 관계는 매일매일 늘 새로웠으며, 쌓이는 시간만큼 우리는 계속 깊어져 갔다. 분명 친밀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 한쪽은 계속 아파왔다. 나의 어린 친구들이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나서도 이 세상이 그들을 계속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 이 공간만큼 이 나라와 이 세상이 그들에게 우호적이며 안전한 곳인지 의문이 들었다. 친구들 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의 부모님들, 특히 그들의 엄마들이 때때로 근심에 찬 얼굴로 허공을 쳐다볼 때면 나는 내 친구들과 내 친구들의 가족들이 지금의 행복을 계속 누릴 수 있는지 묻고 싶어 졌다.
'엄마'들의 근심은 보통 여성노동시장과 돌봄의 사회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면접이 있는 날, 혹은 외근이 있는 날, 중요한 출장이 있는 날,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에 꼭 아팠다.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갑자기 아팠다. 아이들이 갑자기 나는 열에 힘들어하면, 바로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해 보호자가 의료기관에 데려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법이고 원칙이지만 그들의 엄마가 오늘 중요한 면접이 있다는 것을 아는 보육교사들은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은 놀다가도 갑자기 열이 날 때가 있기 때문에 바로 연락을 취하기보다 온몸을 물로 닦으며 열이 내리도록 돌본다. 가능하면 어떻게든 엄마의 중요한 순간들이 순탄하기를 바라며 아이의 건강도 별 탈 없기를 바라며 그렇게 아이의 몸을 닦고 또 닦는다. 나는 그런 순간순간들의 여성 연대와 '분투'를 기억한다. 그러나 동시에 몇몇의 여성들의 분투로 유지되는 작금의 현실도 어떻게든 해결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대학원에 와서 '여성 문제'와 '돌봄의 문제'들을 공부하게 되었다. 한국을 포함하여 돌봄의 사회화가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국가들에서 너무 당연하게 가족 내 여성이 (비공식) 돌봄을 담당하게 되는 현실을 공부할 때는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내 또 다른 문제가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 '친밀함'이라는 사람의 감정에 대한 것이었다. 돌봄을 국가가 책임지는 이른바 '돌봄의 사회화'가 이뤄진다면 그래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서 국가가 적재적소에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까?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난 그렇게 되어야지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으며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갑자기 '친밀함'이라는 감정의 벽에 부딪히게 된 셈이다. 계속해서 돌봄의 사회화가 완전히 이뤄진 상황을 계속 상상해 보면, 국가의 돌봄 서비스가 '완벽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애정과 친밀함을 이유로 직접 내 아이를, 내 가족을, 내 친구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인간에게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그 친밀함과 애정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나를 괴롭혔다.
돌봄 노동은 크게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 나눈다. 그래서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마음과 애정, 노동권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돌봄을 받는 사람의 마음과 만족도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만약 당신이 오늘 독감에 걸려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다면, 당신은 누가 당신을 돌봐주면 마음이 편하고 좋겠는지 생각해보라. 아마도 보통은 친밀한 사람 혹은 친밀함의 영역 안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돌봄이 일시적이지 않고 꽤 긴 시간 아니 기약 없는 돌봄이 필요하다면 보통은 가족 내 여성이 돌봐줄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들은 보통 여자들도 '당연히' 내가 돌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 내 누군가가 돌봄이 필요하면 당연히 일(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이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기대와 당연한 요구들 뒤에는 사회규범과 가족주의, 효사상 같은 거대한 이념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런 이념으로 인해 가족 내 여성들에게 주어진 돌봄 요구를 비판적으로 다시 보는 연구들이 계속 진행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이따금씩 '친밀함'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이론적 모순'을 느끼거나 '여성이 내재화하는 가부장제'를 만나는 것 같다. 그들이 불행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분명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임금 노동으로 인해 여성의 삶이 어떤 현실에 직면하는지를 밝히고 싶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첫 연구에서 나는 결혼 후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아이가 생긴 뒤 일을 그만둔 여성을 만났다. 그렇다. 돌봄의 사회화, 공적 영역에서의 아동 돌봄이 충분히 보장되었다면 일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류의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처음부터 끝까지 '친밀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어차피 세상은 어렵잖아요. 제가 아이를 키우고 나서도 일자리 잡기는 계속 어려울 텐데,
지금 애기가 제일 예쁠 때 내가 보고 싶어요."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아 나 석사 논문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랬다. 그런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너무 맞는 말이라 잠정적으로 그 연구를 중단하게 되었다. 세상은 늘 어렵다. 경제는 황금기 이후 호황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아마 앞으로 계속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저 아이가 '절대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순간은 내 인생 중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는 오늘 이 시간을 온전히 저 인격체와의 친밀함으로 쌓아가겠다는 그녀의 결단은 자녀 돌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밀린 '경력단절 여성'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모성애'라는 말로도 포장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이런 감정에 대한 논의를 내가 연구로 쓰지 못한 이유는 보울이라는 남자 학자가 '보상 이론'이란 이름으로 선점해 버렸기 때문이다. 보울은 돌봄을 하면서 느껴지는 부수적인 감정들 즉, 자녀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든다거나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내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기쁨'이 돈보다 크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돈 보다 귀중한 기쁨과 뿌듯함, 보람 등의 것들을 이미 받고 있기 때문에 임금이 적어도 돌봄 노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저임금 굴레에 있는 돌봄 노동 산업에 노동자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을 증거로 내세워 보울의 이론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그러면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과 여성노동 학자들은 서비스산업, 돌봄 노동 외의 영역에서 여성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과연, 여성이 많아서 저임금 굴레에 들어간 것인가? 저임금 굴레에 있는 직종이라 여성노동자가 많아진 것인가? 또 다른 문제가 머리를 내민다. 이 이야기는 또 다음에 하기로 하고,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는 이런 고민들과 나의 전공 '돌봄 정책'에 대한 접점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과 감정, 애정, 친밀함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의 미래와 노동 지위, 사회적 계층을 잠시 잊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그 결단들이 '한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점의 사회규범도 한 방울의 성별 불평등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속에서 다시 나의 생각으로 돌아가 보면, 나는 아직 이 '친밀함'과 '친밀함이라는 이름의 애정과 희생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사회가 사랑이란 이름의 포장지를 넘어 이제는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비정상성'과 '포기자'를 만들어 내는 것만 같다. 공부만 하다가 삐뚤어져 버린 걸까? 아니면 대학원 생활을 오래해서 살짝 미쳐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해답을 알 수 없는 나의 고민들과 생각들, 질문들을 브런치에 써보려고 한다. "친밀함의 영역과 정책의 상한"이라는 그럴싸 한 제목도 만들어 둘 만큼 박사논문으로 써보고 싶었던 주제이고 그만큼 오래 생각했으며 여전히 애정 하는 주제이지만 도저히 논문의 형식을 따르기에는 조작화가 불가능했다. 또 이 생각들은 너무 오랜 시간 나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이제는 글로 토해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모쪼록 이 글이 어디서든 돌봄의 사회화를 논하는 방향으로 잘 쓰이길 바랄 뿐이다. 흥해주면 더 좋고.
*덧: 중간에 나오는 연구 참여자의 발언과 당시 상황은 맥락을 남기고 전부 각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