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_독립된 인간의 연애와 사랑의 감정에 대하여.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여행에서 남자를 만나 돌아왔고 그 사람과 결혼까지 했다는 뻔한 이야기로 시작한 것이 영 맘에 걸린다. 너무 뻔한 결말이라 몇 명 없는 독자 분들이 지루해하실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우려되는 마음도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우려는 세상이 주는 위협에 대해 잔뜩 날 서있던 나의 마음이 마치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눈 녹듯이 풀어진 것처럼 여겨질까 싶은 우려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경계하는 마음은 아직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죽음의 공포 또한 여전하다.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이 여전히 존재함은 물론이고 낯선 남자가 뒤에서 따라올 때 느끼는 일상의 공포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여성들이 매일, 매 순간 느끼는 공포감은 모든 여성에게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모두에게 없을 때야 비로소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우려는 오롯이 혼자이고 싶던 내가 누군가를 만나 온전해진 것처럼 여겨질까 싶은 우려다. 나는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그 길에서 오롯이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이며 앞으로도 혼자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나는 둘이어서 비로소 행복해진 존재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 도대체 왜 그런 글로 시작했을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감정'에 대한 부분이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 친밀함을 느끼고 애정이라는 감정을 나누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즉, 나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나로도 온전한 존재였으며 비슷한 감정을 나에게 느끼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이라는 걸 했을 뿐이다. 설레는 감정, 연애라는 행위, 사랑이라 명명하는 관계들을 누군가는 갈망하고 누군가는 회의감을 느끼며 누군가는 행복해하는 것이 오늘이라는 시간 아닐까? 나는 그 감정을 말하고 싶었다.
친밀함이라는 감정은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정이다. 어떤 시를 읽고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공감을 넘어 친밀함을 느끼거나 애정의 마음이 솟구치기도 한다. 그런 애정이 사랑이 되고 복합적인 감정들이 모이면 우리는 그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나 자신을 비하하기도 하고 갑자기 사랑스러운 나 자신을 긍정하기도 하고 여하튼 오만 감정을 왔다 갔다 한다. 그런 강렬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이박혜경, 1994 재인용). 그런데 이런 마음에 대해서 설렘을 느끼는 것과 모진 세상을 견딜 힘을 받고 지지를 받는 것, 아무도 나를 대단하게 봐주지 않지만 나를 대단하게 여기는 마음들과 맞닿을 수 있다는 것. 이 감정에 대해서 아무도 정답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 무수한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말한다고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화, 드라마, 영상매체,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배워왔다. "그게 사랑이라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그런 배움에 착실했다. 떨리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게 동성이면 친한 친구라고 배웠고, 이성이면 사랑이고 로맨스라고 배웠다. 매일같이 만나던 친구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몇 개월을 울었지만 그건 여자들끼리의 질투 혹은 여자들의 우정이라고 배웠다. 그냥 가끔 만나 수다 떨면 좋을 친구의 감정이지만 이성이기에 그렇게 자주 만나는 것은 사랑이라고 배웠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다행스럽게 성(姓)이 다른 사람(이성)을 만나 사랑을 했고, 이별을 했고 몇 번을 반복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이성'이기에 별문제 없이 '결혼'이란 걸 했다. 그렇다. 힘들게 시작한 '사랑'이라고 모두 법적으로 '결혼'을 하고 법적으로 인정되는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와 당신을 포함하여 이 나라는 여전히 결혼을 할 수 있는 사랑과 할 수 없는 사랑을 구분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매거진에서 개개인의 가치관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법과 제도, 정책의 영역이 그래도 되는 사랑과 아닌 사랑을 구분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고,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네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 행복을 누리고 생각만으로도 웃음 짓는 일들은 정말 찰나에 불과한데 그 쉬운 일이 허락되지 않는 집단이 있고, 그들이 불행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불행하지 않다. 아니 불행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관심사는 그들의 행복과 불행이 아니다. 나는 한 나라의 법과 제도가 인간의 삶, 라이프 스타일을 규정하려고 드는 방식이 너무 무례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와 섹스를 하고 누구와 사랑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누가 되었든지 쉽게 하는 결정은 아니다. 오늘 내가 마라샹궈를 먹을지 학식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데, 인륜지대사가 과연 쉽게 되는 일이던가? 인륜지대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진학한 뒤, 자취를 할 때 이 많은 동기와 친구, 사촌들 중에 과연 "누구와 같이 살아도 괜찮을지"를 정하는 일은 정말 '고뇌'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삶의 결정에 대해 당사자도 아닌 누군가가 인정을 하네 마네 하는 것이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결코 아니지만, 비슷한 연구를 한 학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Paul Pierson(폴 피어슨, 1996)이고 신제도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다. 신제도주의는 이미 설정된 제도가 사람에게 학습된 규범으로 존재하고, 학습된 규범들은 법과 제도의 개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하는 이론이다. 몇몇 순간들의 비토 포인트(논쟁, 혹은 불화 지점)들을 거쳐 또 다른 규범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이며 사회제도라고 말한다. 제도와 인간의 삶이 꽤나 밀접한 관계라는 뜻이다. 하던 얘기로 돌아가 보면, 동성혼 관련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국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브리타니 찰튼 박사 연구팀은 동성관계를 보호하는 법 즉,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에 대한 법률 보장이 되기 전과 이후 시민들의 성적 지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비교연구를 진행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마도 당신은 "변함없었을 것"이라고 속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구결과는 나의 가설대로 동성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차별 없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 동성애 혹은 양성애를 포함하여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30%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김승섭, 2017: 재인용).
동성혼 말고도 우리의 사랑을 규정하는 법의 무례가 또 하나 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 데이트 폭력, 성폭력, 가정폭력이 그것인데 끊임없는 여성운동가들의 정치운동과 별개로 그것은 계속 사적인 것으로 사소한 해프닝으로, '격한 사랑'으로 규정된다. 누군가의 사랑은 위법이라고 했던 이 나라의 법이 누구의 폭행은 사랑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이 모순적인, '반대의 무례'에 대해서도 당신과 나누고자 한다.
덧. 나의 글이 이 사회의 비토 포인트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사랑은 자신을 긍정하게 하는 놀라운 변화와
자기 비하 사이를 무수히 오가게 하는 강렬한 무엇이다.
- 이박혜경. (1994). 결혼에 대한 반성적 사고. 여성과 사회, (5), 206-215
- 김승섭. (2017). 아픔이 길이 되려면. 서울:동아시아.
- C. Pierson. (2007). 전환기의 복지국가. 현외성·강욱모 옮김. 파주:학현사. (원서출판 2006)
Pierson, P. (1996). The new politics of the welfare state. World politics, 48(2), 143-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