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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돈균 Jan 20. 2019

시의 이미지가 도착하는 시간

'시인'이라는 타자의 시간

죄는 탕감될 수 있는가

한 소읍에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이 죽었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들이 누구인지 책임 소재도 명확하다. 하지만 사건에 가담한 아이들의 부모들은 모여서 상의(모의)한다. 어떻게 하면 사건을 사고로 축소시키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무마할 것인가. 어떻게 죄의 책임을 회피할 것인가. 아이의 부모들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가장 일반적이고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아빠가 모두를 대신하여 이렇게 결론짓는다. “결국 돈(보상금)이네.”


오늘날 세상의 해결책은 이렇듯 간단하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타인의 생명은 돈과 맞바꿔지며, 죄는 ‘보상’이라는 합리적이고 법률적인 테두리 안에서 탕감된다. 이 탕감의 메커니즘은 꽤나 효과적이다. 사건 연루자들에게 잠깐이나마 발생했던 죄의식조차 돈을 지불하면 된다고 의식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정신의 메커니즘은 사건을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생각하며, 개인과 공동공간은 이런 식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정상화’된다.



주변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이 익숙한 에피소드는 이창동의 영화 <시>의 한 장면이다. 죄의 연루자들이 취하는 저 능숙하고 신속한 대응은, 지금 이 시각에도 사회라는 이름의 공동공간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 처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동일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행동 양식을 지닌 한 사람이 나온다. 사건의 한 연루자인 손주의 할머니, 양미자씨다(윤정희 역). 그녀의 손주 역시 한 여자 아이의 집단 성폭행에 가담했고, 그 여자애는 자살했다. 그래서 양미자 씨도 이 사건을 빨리 덮어버리려는 부모 회의에 소집되었다. 하지만 이 심각한 자리에서 미자씨는 회의 도중 뜬금없이 홀로 바깥으로 나간다.  영화에서 화면은 다른 부모들과 미자씨를 나눈 안팎의 큰 창을 통해서 창 안의 부모와 창 바깥의 미자씨가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들은 어떻게 다른 시간에 거주하는가.



사과를 잘 보기

영화 <시>에서 미자씨는 시 쓰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일반인으로 등장한다. 한 번도 시를 써본 적이 없는 미자 씨는 마을 문화센터에서 시 쓰기 강좌를 수강하고, 강사 김용탁 시인(김용택 역)으로부터 시를 쓰기 위해 ‘사과 잘 보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그 날 이후 ‘사과 잘 보기’는 미자씨의 화두가 된다. 사과를 잘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미자씨는 그 시각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될 때 한 편의 시를 완성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미자씨가 성폭행 사건에 이은 여학생의 자살과 관련하여 연루자 남학생의 부모 회의에 호 받은 것은 이 시 수업을 들은 직후다.


회의 도중 아빠들의 얘기를 듣다가 갑자기 바깥으로 나간 미자씨는 화단에 놓인 꽃을 유심히 바라본다. 화단에는 붉은 꽃이 피어 있다. 미자 씨는 불현듯 메모장을 꺼내서 최초의 시구를 얻는다. 그는 메모장에 ‘피 같이 붉은 꽃’이라고 적는다. 그녀는 왜 바깥으로 갑자기 나갔으며, 왜 하필 여러 대상 중에 꽃을 쳐다보았을까. 그리고 왜 하필 '피 같이 붉은 꽃'이라는 표현을 얻게 되었을까.  이 장면은 감독이 생각하는 시가 무엇인가를 시사할 뿐만 아니라, 시의 이미지가 가장 깊은 내면의 차원에서 어떻게 생성되가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나아가 이 시구는 현실의 시간과 시의 시간, 일상인의 시간과 시인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기도 한다.    


미자씨의 시구에서 ‘붉은 꽃’은 ‘피’에 비유되고 있다. 그녀의 내면에서 꽃의 빛깔은 피와 다르지 않게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영화의 청중들이, 시의 독자들이 통속적 수준을 넘어 이 영화에서 '시'의 비의에 이를 수 있는 첫 째 장면은  여기다. 그러나 비의에 닿는 것은 쉽지 않다. 거기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워온 시에 대산 범속한 이해가 우리를 간섭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시구에 대해 청중ㆍ독자들이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속적 이해란 이런 것이다.  '피 같이 붉은 꽃'에서 '붉은 꽃'은 원관념이며 '피'는 보조관념으로서, '피'는 원관념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 시인이 찾아내고 선택한 대상이라는 식의 설명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시를 쓰는 일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두 가지 통념에 기초해 있다. 시를 쓰는 주체가 시인이라는 생각이 그 하나이며, 이미지는 여러 가능한 ‘옵션’ 중 하나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시가 쓰이는 깊은 층위에서 보자면, 미자씨에게 ‘피 같이 붉은 꽃’은 본인이 '쓴' 것도 아니며, ‘피 같이’이라는 비유는 선택 가능한 여러 임의적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서 선택의 주체는 미자씨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이기 때문이다. 청중ㆍ독자들은 미자씨가 이미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미자 씨를 통해 메모의 형식으로 ‘도착’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타자로부터 도착한 메모

이 시구는 사건의 당사자들이 사는 시간과 미자씨가 사는 시간 차원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에서 일상의 시간과 시인의 시간이 어떻게 다른지를 암시한다. 죄의 본질을 묻기 전에 죄로부 회피를, 책임을 묻고 수용하기 전에 책임의 탕감을 꾀하는 연루자들의 통속적 시간은 실용적도구 이 층위에 있다. 그와 달리 미자씨는죄의 현장,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른 여학생의 시간을 '몸으로' 살고 있다. 실용적 시간이 아니라 윤리를 질문하는 시간이다. 미자씨는 피해자의 ‘피의 시간’을 이미 살고 있는 중이다. 지금 미자씨에게 ‘붉은 꽃’ 피의 현실 이외의 것일 수 없다.


 ‘피 같이 붉은 꽃’에서 '피'는 붉은 꽃을 꾸미는 말이 아니며, 관조적 시선으로 외부 대상에 감정을 임의로 이입한 것도 아니다. 미자씨의 무의식은 이미 ‘붉은 꽃’에 스며 있으며 꽃이 된 그 몸은 ‘피’를 흘린다. 피와 붉은 꽃, 시의 시간과 피를 흘리는 꽃의 시간, 시인으로서 미자씨의 시간과 죽은 여학생의 시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미자씨는 이 순간 시 쓰기 강좌에서 제시된 ‘사과 잘 보기’의 진정한 의미가 ‘(스스로) 사과 되어보기’였다는 사실을 부지불식 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시구, 의미심장한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시인에게 도착하는 타자의 필연적 메모와 비슷하다. 시인은 시구를, 이미지를 선택할 수 없다. 시는, 시의 이미지는 시인보다 크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시인의 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어떤 공명을 통해 시가 씌어지는 손에는  다른 시간이 임재다. 항거할 수 없는 타자로부터 발신된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이 시의 시간이다. 전적으로 내 안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없는 바깥의 무엇이 내 시 쓰기에서 어떤 이미지로 발생한다는 데에 시의 신비가 있다.


이때 시인은 자기가 쓴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미자씨는 자기가 떠올린 ‘피 같이 붉은 꽃’이라는 시구가 죽은 여학생의 임재라는 것을 끝내 인식하지 못한다. 여학생의 시간을 살고 있는 시인의 몸에서 이 시구는 분리되어 관찰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외적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 분리되지 않는 현실은 미자씨의 시선으로 본 삶의 풍경과 죽은 여학생의 시선으로 본 삶의 풍경이 하나로 겹치는 미분리 영상으로 표현된다.


엄밀하고 깊은 의미에서 시의 시간은 ‘내 시간’이기 전에 타자가 내 몸으로 침투하는 시간이다. 시의 시간은 쓰는 시간이 아니라 씌어지는 시간이다. 시는 주체성의 강화가 아니라 주체성의 해체와 개방을 통해서만이 열리는 신비다. 시는 주체의 바깥에 나의 동일성으로 흡수할 수 없는 타자의 '있음'을 알게 하는 현전의 장이다. 그런 차원에서 시는 '나-우리'가 인지하고 있던 세계 외부, 타인의 얼굴, 존재의 외재성을 환기한다. 시의 이미지는 '바깥'으로부터 내게로 도착한다. 나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무엇이 도착할지 씌어지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시의 시간은 깊고 멀고 낯설다.  


'시인'이란 주체를 부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타자가 도착하는 시간의 장을 칭하는 외재성에 관한 호명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문ㆍ심의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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